[허영선이 만난 '사람']주성산 난징대도살사난동포기념관장
역사의 상처와 평화는 함께 가는가. 그는 한쪽 어깨에 역사를, 다른 어깨에는 평화를 얹고 있다고 했다. 20년 한길. 그만하면 여기에 뼈를 묻고 있다고 해야하리. 중국 난징대도살사난동포기념관 주성산 관장. 역사학자이며 시인이기도 한 그는 난징 대학살에 자신의 생을 걸고 있다. 한때 제주 4·3의 현장을 찾기도 했던 그의 시선은 미래를 향한 평화의 배로 항해하는 것. 어떤 전쟁도 민중이 가혹한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그는 제주4·3평화기념관과 난징기념관의 최종 목적은 평화라고 했다. 가을이 오기 전, 그를 만났다. 무엇일까. 그 시간, 애절한 영혼들이 떠도는, 무수한 죽음이 묻힌 만인갱 유적 위 기념관 광장의 아득함은. 알 수 없는 잿빛으로 아른아른 거리던 그것의 실체는. 제주4·3의 아픔을 공유하는 그와의 못다한 이야기는 이메일로 주고받았다.
![]() | ||
| 난징대도살사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死難同胞紀念館) 1954년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에서 출생. 역사학자. 시인. 난징사범대학 세계정치국제관계 대학원 졸업. 연구관원. 난징대학살역사연구회 회장, 중국항전역사학회 상무 부회장. 중국기념관 전업위원회 부주임, 중국일본사학회이사, 중국작가협회 회원, 저서로는 「난징대학살생존자증언」, 「난징대학살 외국인사 증언」, 「300000원혼의 부르짖음-주성산이 연구하는 난징대학살문집」, 「해외난징대학살사료집」, 「세계평화개황」, 「평화학개론」, 「미래를 위한 노래-주성산이 연구하는 평화학문집」, 「도우시로우와 13년」, 「문화에는 국경이 없다-주성산 산문집」, 「불굴의 성문」 등 저서, 합편, 주편한 서적이 66권. 「영화 난징!난징!에 관한 역사학 평가」 등 논문과 문학작품 다수가 있음. | ||
전쟁의 시대, 대학살의 후유증은 2, 3세까지 미친다하던가. 역사의 기억은 기념관 뿐 아니라 몇날 며칠을 흘러내렸던 장강이 기억한다. 학살의 기억으로 만개한 기념관 자체가 증거한다. "오로지 평화로운 미래를 향한 마음 하나로 기념관을 가꾸고 있습니다." 난징대학살을 대중에 알린 아이리스 장 조각상 앞에선 주 관장은 20여 년을 이 곳에 출근한다. 하루에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애도하는 이 공간이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교육하는 장소가 되기를 희망하먼서.
# 역사는 문화의 자원…조각의 대상은 병사와 서민
"난징은 명나라 때부터 유명한 시인 화가들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중국의 4대 명저 「홍루몽」 「삼국지」 「서유기」 「수호지」가 다 남방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국인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했듯, 중국인들도 그만큼 아끼는 작가들이 있다.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그는 문학작품을 즐긴단다.
"제(祭)-/피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하여 /30여만의 불굴의 원혼을 위하여 /일본이 이 역사를 말살하기 때문에 /중국에도 이 역사를 잊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난징대학살이라는 역사를 만들어 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역사의 피값을 잊어버리고 있다 /어떤 것은 잊어서 되지만 /한 민족의 피눈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고 /역사의 비극은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된다…"(주성산 '세계는 평화를 바란다' 중에서).
"역사는 문화의 자원"이라는 주성산 관장. "기념관의 조각은 병사, 서민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국제법에 의하면 전쟁시기 노인, 아동, 여인을 포함한 서민은 살해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난징대학살기간 일본군은 난징의 죄없는 서민들을 아주 잔인한 수단으로 살해했습니다. 인류의 집단범죄입니다. 기념관의 조각 전체가 역사에서 왔고, 역사에 충실하게, 역사를 원상회복했습니다.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자원으로서 발굴하고 지켜나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1985년과 2007년을 거쳐 기념관은 지금의 규모로 변화했지요."
# 할아버지 통해 어린시절 난징대학살 들어
난징시 번화가의 신주쿠 은행에서 일하던 할아버지는 출퇴근하면서 장강에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했다. 후일 퇴직금을 받으러 어린 주성산을 데리고 가면서 그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했다는 역사를 들려주었다. 첫번째 받은 그의 충격이었다.
한 장쑤성 군인이 낸 '난징대학살'이란 보고서를 보고 두번째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가 군대 갔을 때란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혼자 구술을 채록하고 적고 그랬습니다." 본격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90년 기념관에 오면서다. "여기와서 조사하고 연구하니까 감성이 이성으로 바뀌었습니다."
끈질긴 난징대학살 진실 찾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생존자들이 200명 정도입니다. 일본까지 가서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250여명의 일본군인들을 찾아 채록했습니다. 당시 난징 안전보호구역에 살던 미국 독일 러시아 사람들을 찾아 해외채록도 병행했지요." 그는 얼마전 난징기념관에 근무하던 생존자 한 사람이 지난 7월 세상을 떴다고 안타까워했다.
"기념관의 주제는 한마디로 난징학살의 역사를 통해서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배치도도 그렇습니다. 앞부분은 역사를 보여주고, 뒷부분은 평화를 이어가는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보고 마지막은 평화를 가슴에 안고 기념관을 떠나게 됩니다." 난징평화연구소 10년, 난징기념관에서 20년이라는 주관장. 한중일 역사교과서에도 공동참여 했다.
"기념관은 문물자료의 수집, 연구조사, 전시기능을 합니다. 지금 전시해놓은 사진들은 3300장 정도밖에 안되는데 자료는 15만 건 되니까 계속 돌려서 전시합니다." 기념관엔 작년에도 570만명이 다녀갔단다. 최근들어 홍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중이다. 중국 전역은 물론 러시아 모스크바에 가서도 전시를 했다.
거대한 벽면의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의 자료를 모아놓은 문서보존벽 앞에는 10여m 높이의 벽면의 글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간체로 박힌 '前事不忘, 后事之師(지나간 일을 잊지 않으면, 훗날의 교훈이 된다)'. "역사를 거울 삼아 미래를 개척하자"는 메시지가 담긴 이 말씀은 기념관의 모토.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때 주은래가 일본에 건넨 말이다. 아이러니다. 영유권 분쟁으로 현재 중국과 일본은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 올해 75주년 33분동안 기적 울리고 고동 울리고
그는 요즘 참 바쁘다. 오는 12월13일의 75주년 기념행사가 눈앞에 있어서다. 이날 전 난징시에는 사이렌이 울려퍼진다. 33분 동안. 난징을 지나는 배는 고동을, 기차는 기적을 울리고, 일하던 시민들은 묵념을 한다. "이렇게 큰 추도식은 나라에서 앞장서서 합니다. 올해는 좀 더 성대하게 하죠. 전쟁 평화의 박물관들과 국제교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쑤성 최대의 공업도시로 성장한 난징. 대학살 이후, 대지의 아픔과 기억은 여전히 난징 사람들의 가슴을 억누르고 있으리. 어떻게 잊겠는가. 오리처럼 묶인채 끌려가던 수많은 사람들을, 시산을 이뤘던 주검을, 그들의 질린 비명을 삼켜야했던 장강을. 난징시내 3분의 1이 사라졌다. 30만이 사라졌다. 일본군은 탄알이 아까워서 키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아놔서 한꺼번에 학살했다 한다.
이들은 일곱번째 유해 발굴을 했다. 유해발굴을 다시 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발굴할 계획을 하지 않습니다. 발굴하면 안되지요. 현장 그대로 유지하자는 마음입니다. 계속 발굴한다면 유골도 더 손상이 많을 겁니다. 만인갱 들어가는 입구 앞쪽 현장은 1985년에 발굴해서 진열한 겁니다. 현장을 복원하지 않고 유지하자 해서죠. 현장을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은 그때 피해자의 시체가 아니다하기도 합니다. 그때의 유해가 깨지니까 약처리를 했더니 아니다, 문화대혁명 때 유해다 하는 주장도 합니다."
기념관을 찾는 일본인들도 많다.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사죄를 합니다. 국가가 사죄하진 않았습니다. 이러한 침략과 가해의 역사는 다시 발생해서는 안되고 일본은 자신이 지은 죄행에 대해 반드시 사과를 해야합니다."
# 스스로 상처 드러내 직면한 제주4·3 어려운 일
"4·3은 자신들의 상처를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4·3사건을 한국인이 직면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입니다. 한 나라가 잘못을 저지를 순 있지만 잘못을 직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중국도 난징기념관은 일본이 침략한 것이어서 기념관을 세우기 쉽지만 자기 나라가 잘못한 일을, 중국으로 말하면 문화대혁명 같은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3사건과 난징대학살은 많은 연관이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성산. 그 역시 제주에서 그러한 상처를 목격하였고, 동질의 상처를 느낀다했다. 제주4·3연구소와의 교류로 제주땅을 처음 밟았을 때는 부관장 시절이었다. "당연히 4·3유적지들을 봤습니다. 제주도 자연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인상깊었습니다." 근래들어 제주에 중국인 관광객이 폭발적이라는 말에 중국에서도 한국 기업들의 성공사례가 많다고 답한다. 자연적인 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두 역사의 공간은 죽은 이들을 위한 공간, 그 대상이 모두 민중입니다. 특별히 우리 기념관은 영웅 인물이 아니라 서민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관이라는 것입니다. 국민당 시절 중국 붉은색은 공산당을 의미하지만 난징대학살은 그런 붉은 색이 아닙니다." 4·3과 평화 공원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애기다. 그는 제주4·3평화재단과의 교류 역시 평화로운 미래로 가는 길이라 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책임을 지적으로 대해야하고, 역사문제를 잘 처리해야 하며, 평화의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평화박물관으로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계인들에게 이토록 비참한 역사는 잊혀져선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목적은 평화입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