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예술작품기행] 37.이중섭의 가족

▲ 이남덕 여사가 기증한 이중섭 화백의 팔레트
70여 년간 보관해온 주인의 팔레트, 이제는 이중섭미술관이 보관해야
피난민 배급받던 서귀포 시절, 하루 한 끼 먹어도 배부른 행복한 가족

#팔레트는 주인의 분신

2012년 11월 1일 날씨는 다소 쌀쌀했지만 하늘은 쾌청했다. 이중섭미술관에서 보는 바다는 유독 푸르렀고, 미술관 정원의 나무들은 여느 때와 달리 잔잔한 바람에도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중섭 화백의 유일한 유품인 팔레트 기증식이 시작되는 오전 11시, 이중섭 거주지는 잔칫집 마냥 술렁거렸다. 식전행사로 치러진 퍼포먼스는 이중섭 화백의 환생을 상징하는 날개짓을 했고,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함이 바이올린 연주자의 선율을 타고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맨 앞줄 휠체어를 탄 한 명의 일본인 여성은 약간 고개를 수그리고 회상에 잠긴 듯 했다. 이남덕(李南德). 일본 이름은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그녀는 92세의 이중섭 화백의 미망인이다. 바로 옆에는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 이중섭 화백 가족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던 집주인인 김순복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그녀 역시 92세다. 이중섭 거주지 마당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분의 모습은 개인의 인연을 넘어 역사적인 인연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 기증식에 참석하는 이남덕 여사
이중섭 화백의 팔레트를 기증하기 위한 이남덕 여사의 서귀포 방문은 이남덕 여사와 서귀포에 있어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고, 한국미술사에도 또 한 줄의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날이었다. 이남덕 여사는 한 아름이나 되는 이중섭 화백의 팔레트를 안고, 팔레트에 대한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 팔레트는 1943년 아고리가 원산에 다녀오겠으니, 그때까지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맡겼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팔레트를 주인(이중섭 화백을 이르는 말))의 분신으로 생각하고 소중히 보관해 왔습니다."

아고리는 이중섭 화백의 일본 유학시절 별명이다. 이중섭 화백의 턱이 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데, 이중섭 화백과 이남덕 여사 사이에서도 줄곧 애칭으로 쓰여 졌다.

"아고리가 돌아가신지 반세기가 됐습니다. 이제 저도 90살이 넘었습니다. 멀지 않아 저도 주인을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 팔레트를 제가 보관해 왔지만 서귀포시에서 미술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 팔레트를 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관하고 있던 것 그 이상으로 서귀포시에서 보관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관중석은 감격의 물결로 일렁거렸다. 이 팔레트는 이중섭 화백이 이남덕 여사에게 프러포즈의 징표로서 맡겼던 것이다. 이남덕 여사는 팔레트를 이중섭 화백의 사랑의 상징으로생각하여 70여 년간 소중히 보관해 왔다. 이 팔레트는 이중섭 화가가 1943년 일본 미술창작가협회(자유미술가협회 전신)로부터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했을 때 부상으로 받은 것이다. 팔레트 이면에는 이를 증명하는 화인(火印: 賞 美術創作家協會)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이남덕 여사는 이 팔레트가 이중섭 화가가 귀국하기 전 수개월 동안 사용했었다고 회상했다.

또 이남덕 여사는 팔레트와 함께 이중섭 화백이 태양상을 수상할 무렵의 사진 한 장을 기증했다. 이중섭이 태양상 수상 당시 일본인 친구 화가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이날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날 팔레트 기증식에는 그동안 팔레트 기증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이중섭 화백의 문화학원 미술과 후배인 오무라 아키고(大村秋子) 여사와 그의 남편인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도 참석했다.

오무라 마스오 명예교수는 인사말을 통해 "당시 이중섭 화가는 이 작은 집, 작은 방에서 살았지만 정말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눕기에도 좁은 방이었지만, 여기에서 가족 4명이 살았습니다. 이남덕 여사는 이 집 아래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가에서 빨래도 하고 바닷가에서 게를 잡은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 이남덕 여사는 한국말을 전혀 못한다고 하셨지만, 이곳 제주에 와서 오다가다 한국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한글간판도 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오무라 마스오 교수는 그1999년 『제주도 문학선』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다시 2009년에는 제주작가 19명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해 『돌과 바람과 유채꽃』이라는 시선집을 발간했다. 그는 또 40년 동안 잃어버렸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최초로 찾아낸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오무라 아키고 여사는 그동안 일본에서 이중섭 화백의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 1940년의 이남덕 여사 모습
#이남덕 여사의 서귀포 시절

이남덕 여사의 서귀포 시절의 기억은 매우 새롭다. 이남덕 여사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냥 마냥 행복한 얼굴을 했다. 

"내가 태성(泰成)이를 등에 업고 우물가에 있을 때, 주인이 태현(泰賢)이의 손을 잡고 게를 잡으러 지나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당신 남편 지나간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때는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동네 부인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말을 잘 몰라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이남덕 여사는 이중섭과 아이들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주인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방문을 닫고 그림을 그리는데 아이들이 밖에서 아빠를 부르면, 나(이남덕)는 아빠 그림 그리는데 방해되니까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안에서 '오냐'하면서 대답을 하기도 하고, 밖에 나와 아이들과 놀아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그림을 그릴 때는 어려서 죽은 아들도 함께 그리곤 했습니다. 아이가 세 명이 있는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입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웃의 형편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피난민 배급에 의존해야했던 이중섭 가족은 끼니 잇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가족끼리 헤어지지 않고 모여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고 한다.

"서귀포에 살 때는 누구나 다 힘든 때이기도 했지만, 하루 한 끼를 먹고도 행복했습니다. 그 때는 아이들도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도 이상하게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서 게를 잡아서 먹고 밭에선 부추를 캐다가 데쳐서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 이중섭 화백이 가족을 그린 엽서
#가족 그린 엽서와 팔레트

이중섭의 엽서 그림 중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림이 있다. 펜화로 그려진 이 엽서 그림은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이남덕 여사에게 보낸 것이다. 이 엽서에는 속옷만 입은 이중섭 화백이 큰 팔레트를 들고 캔버스에 행복한 시절의 가족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한쪽에 차곡하게 세워진 캔버스, 화면 앞쪽에 쌓인 가족에게 보내는편지와 가족으로부터 온 편지들. 피우다 만 담배 파이프, 비례를 무시한 펜 등은 이중섭 화백의 가족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사물들이다. 이중섭 화백은 이남덕 여사에 대한 그리움을 엽서에 담아 보냈다. 1953년 이후 헤어진 이중섭 화백이 가족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오직 한 가닥 기쁨이 있다면, 날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당신의 다정한 편지입니다......당신의 편지를 받는 날이면 다른 날보다 그림이 훨씬 더 잘 그려집니다.

나는 정말 외롭습니다. SOS.....SOS.....SOS.....언제나 건강하고, 다정한 당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기쁘기 그지없겠습니다....."

엽서 그림의 팔레트가 가족을 향한 이중섭 화백의 그리움의 상징이라면, 1943년 이남덕 여사에게 준 팔레트는 그 가족을 있게 한 사랑의 징표일 것이다. 2012년 11월 1일, 이남덕 여사가 그토록 소중하게 보관하던 팔레트를 이중섭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이중섭 화백을 향한 이남덕 여사의 끝없는 사랑이 또 하나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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