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바꾸는 힘, 공공미술] 5.충청남도 보령시 '다시 그려진 성주리 이야기'- 황진문화예술연구소

▲ 이재황·황혜진 작 '마을쉼터'를 배경으로 지역 어르신들이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석탄산업 사양화 이후 급격히 늙고 공허해진 시골 마을 변화 시도
길 따라 14개 문화포인트…문화수용력 확대·접근성 한계 극복 관건

거뭇한 먼지가 흩날리는 거리를 아이들은 달렸다. 찰강거리는 엿장수의 가위 장단에 뭐가 홀린 듯 내달렸다. 멀리 막장 작업 완료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일용할 양식을 찾아 둥지를 떠나 전국 팔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하루가 포개진다. 공부를 위해 도회지 학교로 나서는 아들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흡족한 표정과 어떻게든 검은 굴레를 벗어나려 이를 악무는 젊은이들, 그 안에서 알아서 인생을 배우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탄광촌 사람들의 길다면 긴, 또 짧다면 짧은 인생 여정은 지금은 모두 '어제'가 됐다. 채탄 작업이 한창이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사람 소리로 의지했던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탄광마을(8리) 이야기다. 시대 흐름에 따라 저절로 낡아버린 마을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사이 미술이 자리를 잡고 섰다.

▲ 김용·황혜진 작 '광부의 미소'

# 문화·경제적 소외의 흔적

폐광하면 일단 강원도를 연상하게 된다. 충청남도 깊숙한 어귀에 있는 탄광마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탄광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며 폐광과 인근 지역 주민의 깊어진 한숨을 채우기 위해 카지노며 문화시설 구축 등 다양한 시도들이 진행됐다. 하지만 이들 관심 모두가 강원도 등 특정 지역에 쏠리면서 성주리는 '탄광마을'에서 '폐광마을'로 이름만 바꾼 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마을은 점점 늙고 또 비어갔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던 거리는 을씨년스런 바람만 오간다. 흘러버린 시간만큼 늙어버렸지만 여전히 마을을 지키는 주민들 보다 공간이 비어가는 속도가 더 빠랐다. 한때 사택 밀집 지역이었던 탓에 비어버린 공간은 상처가 돼 보기 흉한 딱지가 돼버렸다. '문화·경제적 소외라는 것이 지역'이 미치는 파괴력을 마을이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도시 미관 개선에서 지역에 문화 숨통을 트는 것으로 공공미술의 개념이 바뀌고 마을미술프로젝트란 이름이 붙여지는 과정에서 성주리에도 변화가 시작됐다. 급작스런 쇠퇴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면서 상실감만 키웠던 주민들이 조심스럽게 바깥의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황진문화예술연구소(대표 이상봉)은 지난해 마을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다시 그려진 성주리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마을의 과거 이야기를 재해석해 공간을 채워가는 작업이었다. 성주리 주민들의 생활공동체 공간인 노인회관을 심장으로 마을 구석구석 문화 혈류를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탄광 마을에서 자란 한 어린이가 '우리 마을 개울엔/까만 물이 흘러갑니다/우리 마을 한가운데를/우리 마을 이야기처럼/흘러갑니다/지나가는 사람들/사람 못 살데라/함부로 말을 하지만/우리 이웃들/조그맣게 조그맣게/어깨 맞대며 살아갑니다…'(임길택 동시집 「탄광마을 아이들」중 '사람 사는 곳')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마을은 그렇게 바뀌어 갔다.

▲ 안치수 작 '성주리가족-폐탄조형물'
▲ 안치수 작 '성주리가족-폐탄조형물'

2개월여의 주민 협조 요청과 설명회 등을 거쳐 9월 주민참여프로그램으로 시작된 작업은 12월 말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총 14개의 벽화와 조형물은 마을의 시간을 새로 쓰기 시작했다.

# 유유자적에서 답 찾다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주민들은 벽화나 조형물 같은 미술작품 대신시설을 보수하거나 도로를 정비해주길 바랬고, 자치단체는 진행여부에 대한 보고와 함께 가능한 눈에 띄는 곳에 설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작가들이 고집했던 것은 유유자적, 조금 시간을 들이더라도 마을의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장치였다. 천천히 걸어서 가는 길은 힘들지만 보고 듣는 것이 많지만 자동차로 후딱 쉽게 가 버리면 아무것도 보고 들을 수 없고 얻는 것도 없을뿐더러 배울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답은 소통에 있었다.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설득을 하고 작품의 위치를 조금씩 바꿔가며 조율했다. 처음 계획서보다 작품수가 늘어났고 디자인 첨삭도 이뤄졌다. 처음에는 대면대면 작가들의 움직임을 곁눈질하던 주민들이 조심스럽게 음식과 차를 건네기 시작했다. 성주리 주변 식당과 문구점, 빵집, 철물점, 페인트점 등에서 재료를 구입하고 식대를 지출하면서 지역 경제에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

현재 보령시는 이곳을 경제 자립형 별빛 마을로 개발하다는 청사진을 내놓은 상태다. 국비 등 108억원을 들여 이들 지역을 무궁화 테마도시로 조성한다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 이영숙 작 '빵집할머니슈퍼'
▲ 탄광마을 골목에 문화DNA를 흘려넣는다는 목표는 주민과의 의견조율 과정에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 '다음' 단계를 기약하며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마을의 문화 수용력과 접근성 확보 부분이다.

마을 입구 방문객을 맞이하던 '광부의 미소'(김 용·황폐진 작)만 웃고 있을 뿐 지역을 찾는 이들을 향한 마을의 반응은 아직 미지근하다. 카메라를 들고 몇 번이고 마을 중심도로를 오갔지만 주민들과 눈을 맞추기 어려웠다. 재활용해 만들어진 예술작품들은 주민들의 일상에 녹아들었지만 그만큼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본래의 느낌이나 맛이 퇴색되기도 했다.

성주리 탄광의 특징인 수직형 갱도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주민들의 삶의 방식을 투용한 벽부조 작품들은 주차된 차에 가로막혀 쉽게 분간하기 어렵고 탄광 갱구 모양을 본 딴 버스 정류장 벤치에는 사람 대신 지역 쓰레기봉투가 등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 눈을 의심케 했다.

자치단체 차원에서 이 일대에 대한 대규모 개발사업 계획을 제시했지만 아직은 '외진' 시골마을이라는 아쉬움이 '다음' 변화를 기약하게 했다.
 

"교육·문화·경제 삼박자 맞아야 효과 커"
●인터뷰/이상봉 황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 이상봉 황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대상으로 선정된 지역이나 마을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는 처음 계획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성주리에서의 작업은 아쉽다"

이상봉 황진문화예술연구소 대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태풍 볼라벤으로 마을 입구 조형물 일부가 훼손됐다는 얘기를 막 들은 참이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맘고생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이다.

당초 이 대표 등이 계획했던 것은 골목을 통한 '확장'이었다. 이른바 문화 모세혈관을 살려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계획이었다. 사업 낙점 후 막상 뚜껑을 열고난 뒤부터 '수정'의 연속이었다. 마을 주민들의 낙후된 시설이나 도로의 개·보수를 먼저 요구했고, 자치단체는 골목이 아닌 대도로에만 눈을 맞췄다. 주민 참여 유도를 위해 오래된 담장을 걷어내고 미장을 하는 등의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작품에 투입할 비용이 부족해지는 등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마을과 가슴높이를 맞추며 골목쉼터공간이나 빵집할머니수퍼 등 성주리 만의 문화 인프라가 갖춰졌고 참여 작가 중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가 체험 프로그램을 연결해 아트투어 가이드 역할을 자청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대표는 "문화 DNA확산을 통해 지역을 살린다는 취지는 좋지만 일단 지역의 문화 마인드와 현장 상황을 충분히 살피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며 "교육과 문화, 경제적인 부분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성과를 얻기 어려운 사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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