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87> 4·3영령과의 만남 ②

   
 
  50년만에 다시 찾은 외도천 옆 소나무숲에서 배광경 교장(왼쪽)이 조카인 필자에게 4·3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뒤쪽에 새로 조성된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김대생 기자  
 
현기영 "내 작품은 저승못간 혼 달래주는것"
50년전 학살터서 캠핑하다 4·3영령과 만나

4·3영령과의 만남 ②
필자는 이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4·3영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아 며칠 동안 뒤척이던 어느날 가위눌리는 일이 있었던 일을 회고한 이야기였다. 급기야는 누군가 침대를 흔들어댔고, 나는 침대에서 떨어졌다. 꿈이었는데, 실제로 침대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에 교회에 가서 앞만 보고 달려갈 테니 도와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했고, 내 결심이 서자 가위눌림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가위눌림과 침대를 흔든 것은 4·3영령이 조화를 부린 것으로 생각했다. 불현듯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 떠오른 것은 최근의 일이다. 친구 4명과 함께 외도천에 캠핑을 갔다. 물이 많은 속칭 '나라소'를 앞에 두고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뒤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한밤중에 나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음기가 엄습해오고, 불빛이 내 눈앞으로 씽씽 날아다녔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나는 아침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몸살이 심하니 그냥 내려가자"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2박3일 일정의 캠핑은 하루만에 끝이 났다. 내려오던 길에 외도에 있는 이모 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었다. 외도천에서 캠핑을 했다고 하니 이모부가 무심결에 "그 곳은 4·3사건 때 사람 많이 죽은 곳인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다.

나는 제주시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오현단 앞 이도동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동문로터리 주변인 일도동에서 보냈다. 거기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 4·3 피해자가 없었다. 나는 실상 4·3사건이 뭔지 잘 몰랐다. 최근에야 '4·3영령과의 만남'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며 회상하다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들의 피해 실태를 검색해 보았다. 1948년 12월17일, 도평에 살던 일가족 5명이 외도천 부근에서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62세의 할머니, 30세의 아버지, 27세의 어머니, 4세의 딸, 2세의 아들이 몰살된 것이다. 또 같은날 애월읍 상가리 주민 6명도 외도천에서 총살당했다는 신고 내용도 있었다.

나는 외도에 사는 나의 이모부 배광경 교장에게 연락했다. 이모부는 1948년 11월 초순께 '항파두리' 쪽에 살던 고성 주민 10여명이 포승줄에 묶인 채 외도천으로 끌려가 처형됐던 사실을 증언했다. 줄에 묶인 어린이도 직접 봤다고 말했다. 50년만에 이모부와 함께 그 현장을 찾았다. 그때의 잔디밭은 간 곳 없고 소나무숲과 잡목으로 우거져 있었다. 우리가 텐트 쳤던 곳 뒤편 50m 지점이 바로 그 학살터였다. 애기 무덤 등이 많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나는 그때 동행했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랬더니 한결같이 "조훈이 너가 몸이 아파 도중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원혼들이 나에게만 접근했다는 말인가. 결국 그것이 4·3영령과의 첫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한이 많은 영혼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다가 혼백이 머물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에 의지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전기가 전혀 통하지 않은 '부도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잘 전하는 '양도체'가 있듯이. 4·3연구자나 유족들이 영혼과 만나는 특별한 체험은 많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4·3영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온 사람은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이다. 그는 4·3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를 "저승에 안착하지 못한 원혼들을 음습한 금기의 영역에서 대명천지의 밝은 태양 아래 불러내어 공개적으로 달래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해 왔다. 그는 또한 "원혼들의 한은 풀어줘야 해코지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되어 준다"고 강조해왔다.

1989년부터 3년간 위대한 4·3 연작그림 '동백꽃 지다' 작업을 하던 강요배 화백은 그 작업 과정에서 4·3영령들을 만나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고 회고했다. 영령들은 "너 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무언의 압력을 주기도 했는데, 그게 오히려 힘이 되었다고 털어놨다.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고희범(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형체는 없이 사람 모양의 그림자인 4·3영령들을 꿈에서 만났다고 했다.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좋은 데로 가셔야지요"라면서 두 손을 내밀자 그 그림자들이 둥둥 하늘로 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회고했다.

언젠가부터 나도 4·3 일을 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4·3영령들이 도와 줄 것"이란 말을 곧잘 하게 됐다. 행정고시 출신의 '육지' 사람들이 4·3사건처리지원단장으로 여러명 거쳐 갔다. 그들은 대부분 요직을 받고 떠났다. 영전을 축하하면 그들은 "4·3영령들이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것은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다양한 체험을 통해 체득한 엄숙한 고백이기도 하다.

☞다음편은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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