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고 150m 비교적 높고 자락에 염전·철새도래지
눈이 시릴 듯 아름다운 풍광 '압권' 탐방에 1시간
지미봉은 억울하다. 섬의 서쪽이 아니라 동쪽 끝에 있음에도 '땅끝(地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간은 물론 삼라만상의 삶을 지배하는 태양이 그러하듯 매사 동으로 시작해서 서쪽으로 끝나는데 지미봉만은 반대다. 하지만 정상에 서면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지미봉의 실제는 시작이다. 성산 일출봉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그 빛에 찬란한 빛을 발하는 제주의 동쪽 바다는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제주의 '시작'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미봉은 오를 가치가 충분하다. 남쪽 자락엔 도내 최초이자 최대의 염전도 품었던 오름이다.
지미봉은 제주도 섬의 동쪽 끝 구좌읍 종달리(산3-1, 산4·5번)에 있다. 북쪽 하도해수욕장 방향으로 터진 말굽형 분화구를 가지며 원뿔 모양의 동쪽 봉우리가 주봉이다. 남동쪽 자락이 바다와 300m 밖에 되지 않는 탓에 해수면 기준의 표고는 165.8m로 368개 오름 가운데 287번째에 불과하지만 '오름 자체 높이인' 비고는 160m로 상위 5% 수준인 19번째일 정도로 높은 오름에 속한다.
비고로 치면 제주 동부지역에서도 최고인 다랑쉬오름(227m)·높은오름(175m)·일출봉(174m) 다음이다. 특히 저경 907m와 둘레 2636m에 면적이 42만3814㎡(75번째)에 불과, 높이에 비해 면적이 적어 상대적으로 가파르다. 동쪽 자락은 종달리공동묘지다.
이름은 오름이 제주 섬의 꼬리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한자 '땅 지(地)·꼬리 미(尾)'를 빌어 '조선지지자료(1910년)'의 기록처럼 지미봉(地尾峰)이라고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미를 '땅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섬의 머리'라는 서쪽 한경면 두모리(頭毛里)와 연계,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반론도 없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지말산(只末山), 탐라지(1653년)에는 지미산(指尾山), 제주군읍지(1899년)엔 지미봉(地尾烽) 등 '지(只·指·地)'의 한자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주도가 발간한 '제주의 오름(1997년)'에는 '지미봉(地尾峰)'으로 공식 표기돼 있으나 현재 오름 앞 표석에는 '지미악(只未岳)'으로 적혀 있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제주시(종합경기장)에서 지미봉까진 41.3㎞다. 일주도로를 동쪽으로 타고 가다 세화고 입구 사거리에서 우측 세종로 종달 방면으로 빠져 40㎞ 지점인 종달교차로에서 직진, 마을로 1.5㎞ 들어가면 주차장(탐방로지도 A)이다.
탐방은 둘레길을 거쳐 북쪽 입구(〃D)로 오르는 게 좋다. 완만한 경사의 둘레길 1.3㎞를 20분 걷기의 준비운동을 거쳐 정상에 오른 뒤 '절경'인 성산일출봉과 우도 등을 정면으로 감상하며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쪽 탐방로는 야자수매트가 깔려 있어 나무 계단의 남동쪽보다 오를 때 발을 대딛는 느낌, '발맛'이 좋다.
가파른 경사에 관목 사이로 야자수매트가 정상부 교차점(〃E)까지 13분간 계속 이어진다. 간간이 나무 사이로 싱그러운 하도 앞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목재 난간 등을 지나 7분을 가면 정상(〃F)이다. 주차장을 출발한 지 40분이다.
정상에 서면 360도 완전히 오픈된 시야다. 산과 바다·들 제주의 모든 것들을 시원스레 펼쳐진다. 청명하게 쏟아지는 봄 햇살 아래 일출봉과 우도,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바다, 새싹이 돋아나는 밭과 돌담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방불케 한다. 오름 남쪽 자락 '자리코지' 안쪽 전답들이 제주 최초이자 최대의 '전오(煎熬)염전'이 있었던 '소금밭' 터다.
정상에는 조선시대 설치한 수산진 소속의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지미봉수는 북서쪽으로 구좌읍 한동리의 왕가봉수(직선 거리 8.3㎞)와 남쪽 '천연망루'인 일출봉의 성산봉수(〃5.4㎞)와 교신했다.
눈을 서쪽으로 돌리면 식산봉·대수산봉·두산봉·대왕산·거미오름·다랑쉬오름 등 수십개의 동부지역 오름들이 한라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시선을 계속 시계방향으로 돌면 오름 북쪽 자락 너머엔 철새도래지인 하도리 창흥동 양어장이다. 매년 겨울 귀종인 저어새 등 30여종 3000~5000 마리의 철새가 찾고 있다. 여름에는 중백로·황로·해오라기 등을 볼 수 있다.
드넓은 해안조간대와 연안습지가 발달, 바닷물과 민물이 섞여 있는 물속에 숭어·파래·새우류·게류·조개류 등의 먹이가 풍부, 겨울 철새의 중간 기착지 및 월동지가 되고 있다. 약 0.77㎢의 면적이 '제주특별법'에 의해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정상 바로 아래엔 성산일출봉 방향으로 넓은 전망대(〃G)가 설치돼 있다. 기상을 연상케 하는 일출이라는 단어 못지않게 바다 한 가운데 의연한 일출봉의 모습은 볼 때마다 원인 모를 설렘을 자아낸다.
하산하는 길은 쉽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일출봉을 바라보며 내려오면 15분 안쪽이다. 둘레길을 돌아 올라도 1시간이면 탐방이 가능한 셈이다. 남동쪽에서 바로 오르는 데는 25분 정도 걸린다.
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은 "지미봉의 경우 말굽형 분화구가 잘 남아있는 점 등으로 미뤄 젊은 오름 같다"며 "하도리와 달리 종달리 해안가 암석이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많은 것은 이를 형성한 지미봉 용암이 곶자왈을 만드는 아아용암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미봉의 식생은 함덕의 서우봉처럼 해안성 식물이 많다. 사면의 해송은 물론 까마귀쪽나무·사철나무·털머위·우묵사스레피나무 등이 해안성이다. 사면의 억새군락 사이에 인동덩굴·찔레꽃·딱지꽃·제비꽃·야고·쥐똥나무·남오미자 등이 분포하고 있다.
분화구 주변과 내사면에는 후박나무·우묵사스레피 등 상록활엽수와 함께 예덕나무·개구리발톱·양지꽃·돌토끼고사리·상동나무·보리밥나무·맥문아재비·돈나무·자금우·마삭줄·송악 등이 자라고 있다.
김대신 한라산연구소 연구사는 "지미봉은 주변의 철새도래지인 창흥동 습지 등과 이어지며 다양한 식물상을 보인다"며 "특히 지형적인 영향 등으로 오름 동·서사면의 식물 분포에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철웅 기자.
"종달염전은 제주도 염전의 효시인 동시에 소금 생산의 주산지였다고 할 수 있다"
정광중 제주대 교육대학 교수(인문지리학)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1년)에 소금이 제주 토산물이란 기록이 있으나 정의군(旌義郡)지도(1872년) 등의 기록까지도 종달리 해안에만 염전(鹽田)이라 표기돼 있다"며 종달리 염전의 '위상'을 강조했다.
정 교수는 "제주엔 염전이 16세기 이후 형성됐음에도 제염 여건이 좋지 않아 소금이 항상 부족, 말·말총·귤·해산물 등을 본토의 소금과 교환했고 자연재해나 흉년이 발생했을 때는 관의 구황염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제주의 경우 비가 잦아 태양열을 이용한 천일염(天日鹽)이 아니라 농축된 바닷물을 가열해 전오염(煎熬塩)을 만들어야 했으나 암석해안이 많아 바닷물을 농축시킬 '소금밭'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해안가 용천수 등의 영향으로 해수의 염분 농도도 낮았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종달리의 경우 동남쪽에 소금밭 터인 넓은 사빈이 있고 해안가에 지미봉·두산봉 등이 위치,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 제주 동부 어장 중심지인 성산포도 인접해 있어 원료·연료·시장의 3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 염전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1910년대 초 35개까지 있었던 도내 염전 가운데 종달염전은 면적과 생산량에서 최대였다"며 "종달리 353호 가운데 160명이 소금 생산에 종사할 정도였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당시 도내 염전 5만3059평 가운데 종달염전이 1만4357평으로 면적 2·3위인 시흥염전(8178평)과 일과염전(7846평)의 갑절에 가까웠고 생산량도 전체 35만4326근의 4분의1인 8만9052근으로 대정(2만6750)·정의(4만979근) 지역을 합한 양보다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종달염전은 1950년대를 전후 육지부 천일염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가격 경쟁력에서 밀려 도내 다른 염전들과 함께 사라졌다"며 "종달리 염전 터는 1969년 완공된 개간공사를 통해 32㏊의 논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김철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