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어업문화유산 '도내불'을 찾아서] 1. 프롤로그

▲ 사진은 제주특별자치도가 발간한「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 실린 1961년 12월의 외도포구 풍경이다. 제주시 외도동 지역에도 1945년 이전에 만들어진 도대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병자수호 조약 계기로 국내 첫 등대 건립
제주는 민간등대로 불리는 '도대불' 형태
1910년 이후 도내 항·포구에 16기 설치 추정 
원형이나 훼손상태 연구·조사 없이 방치 
 
과거 제주도민들에게 어업은 가장 기초적인 생계수단이었다. 토지가 척박해 농산물 자급은 충분하지 못했다. 어업을 통해 얻는 수산물이 가계를 이끌어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업은 마을 공동사업이나 학교 육성을 위한 재원조달에도 일익을 담당하는 등 1970년대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손꼽혔다. 그 과정에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가 탄생했으며, 1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까지도 어민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렇지만 도내 항·포구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는 옛 등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나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등대의 기원과 역사
 
인천지방해양항만청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등대는 기원전 280년 무렵 지중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항구 인근 파로스섬에 세워진 등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등대는 높이 135m 규모로 대부분 대리암으로 지어졌으며, 40㎞ 밖에서도 불빛이 보였다고 한다. 지난 1100년과 130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무너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1994년 바닷속에서 등대 잔해 수백점이 인양되면서 존재를 드러냈다.
 
하지만 당시 기술로 어떻게 건축물이 세워졌는지, 어떤 방법으로 불을 밝혔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아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우리 조상들도 삼국시대 이후 조선 후기까지 횃불, 봉화, 꽹과리, 깃발 등을 이용해 선박항해의 지표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 근대식 등대가 도입된 계기는 일본과 병자수호조약(1876년)을 체결하면서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도 수교하게 됐는데, 각국의 상선과 군함이 들어오면서 항로표지시설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1895년 우리나라 연안 30곳에 항로표지 설치를 위한 위치조사와 사업계획서를 수립했으며, 우리 정부는 1902년 5월 인천항 팔미도·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서·백암등표 설치공사를 착수했다.
 
이에 따라 1903년 6월 우리나라 첫 근대식 항로표지인 팔미도등대가 점등됐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 제주의 등대 '도대불'
 
▲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 포구에 세워진 고산리 도대불. 김경필 기자
제주에 건축된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지어진 우도등대(1906년)와 마라도등대(1915년), 산지등대(1916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등대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건축된 관청 주도의 근대식 등대로, 제주의 등대로 불리는 '도대불' 또는 '등명대'와는 차이를 보인다.
 
지난 2008년 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가 펴낸 「아름다운 불빛 제주 등명대(燈明臺)」에서는 등명대를 민간등대로 평가했다.
 
근해를 중심으로 어업활동을 했던 주민들이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건축하고 자체적으로 관리했던 등대가 등명대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내에는 10기의 등명대가 남아 있고, 6기는 소멸된 것으로 판단했으며, 1910년부터 1940년 사이에 집중 설치된 것으로 추정했다.
 
제주도도 도내에 도대불이 16기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주도가 파악한 도대불 현황에 따르면 구엄리, 하귀리, 외도동, 애월리, 귀덕리, 두모리, 고산리, 신촌리, 북촌리, 용담동, 김녕리, 우도 영일봉, 대평리, 대포동, 보목동, 강정동 등 16곳에 도대불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불의 원형이나 훼손여부 등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제주의 어업문화를 보여주는 도대불이 각종 개발로 인해 파괴되거나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김경필 차장 대우, 한 권·김하나 기자 / 자문=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제주도(濟州島)는 매력적인 섬이다. 제주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설문대할망이 바다 가운데에 치마폭으로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었고 산이 너무 높아 봉우리를 꺾어 던지니 산방산이 만들어졌다. 흙을 나르는 과정에 치마에서 떨어진 흙부스러기들은 360여개의 오름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러나 바다 위에 외롭게 자리 잡은 제주도는 육지에 대한 갈망이 컸다. 설문대할망은 제주 백성들에게 명주 100동(1동은 50필)으로 속옷을 한 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백성들이 명주를 99동밖에 모으지 못해 속옷을 지어주지 못하게 되자 설문대할망은 다리를 놓다가 중단해 제주는 섬이 됐다고 한다.

겨우 1동이 모자라 육지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과 미련은 제주의 한계로 인식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섬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역설적으로 강조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섬으로 남게 된 제주도는 자연스럽게 육지와 교역을 활발히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해양교역이 이뤄져 왔으며, 고려시대에는 삼벌초군이 제주에 들어왔고 일본을 징벌하기 위해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제주를 기점으로 했다는 사실(史實) 등을 고려하면 거센 제주의 바다를 다스릴 수 있는 조선(造船)과 항해(航海)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전파됐을 것이다. 이러한 해양기술은 어업분야에도 응용돼 상당히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조와 순조까지 약 2세기(1629~1830)에 걸쳐 제주에 내려진 '도민출육금지령(島民出陸禁止令)'은 인적교류와 문화의 단절을 초래했고 어업문화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줬을 것이다.

육지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 튼튼한 고깃배들을 제작하지 못하게 하거나 멀리 고기잡이 활동도 하지 못하게 하는 등의 규제는 결과적으로 삼나무를 통째로 잘라 엮어 제작한 '테우'가 보여주듯이 조선(造船) 기술의 쇠퇴를 가속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근해어업 중심으로 어업활동의 영역도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원활한 물자수송을 위해 포구확장 등이 이뤄지면서 해양교역과 어업도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등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주에서 건축된 등대로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건축된 우도등대(1906년), 마라도등대(1915년), 산지등대(1916년) 등이 있다. 이 등대는 아마도 일제 강점기 당시 침탈한 물자와 사람들이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건축된 제국주의 유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등대는 고유의 기능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상징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먼 바다까지 강렬한 빛을 보내야만 했던 것이 관청의 주도하에 건축된 현대식 등대였다면, 근해를 중심으로 어업활동을 했던 제주어촌마을의 주민들이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건축하고 자체적으로 관리했던 것이 바로 도대불 혹은 등명대(燈明臺) 등으로 부르는 등대다.

제주의 도대불은 제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민간등대이며, 제주 어업문화의 발달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조물로서 문화재적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포구에는 10여기 정도만이 초라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근대건조물에 대한 도민들의 문화인식을 높이고 문화재의 등록추진과 다양한 문화자원으로서의 활용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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