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어업문화유산 '도내불'을 찾아서] 2. 고산리 도대불

일제강점기 포구조성 이후 도대불 축조 추정
'돌등대'로 불리기도…화물선 안전 입항 목적
여러 차례 파손 주민 힘으로 복구 일부 변형
최근 하단부 콘크리트 포장 등 설자리 빼앗겨
 
▲ 제주시 한경면 고산1리 자구내포구에 있는 도대불. 최근 포구공사 과정에 도대불 하단부가 콘크리트로 포장되고 대형 안내판이 바로 옆에 세워지는 등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특별 취재팀
과거 제주시 한경면 고산1리 자구내포구에도 어두운 바닷길을 밝히는 도대불이 있었다. 포구가 만들어질 당시 선박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자구내포구에는 도대불이 있지만 축조될 당시와는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포구 확장공사 등으로 무너졌다가 복구되는 과정에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도대불 원형과 관련해서는 증언 등으로만 일부 전해지고 있는 상태다. 
 
△ 일제강점기 축조, 등대 역할
 
고산리 도대불은 일제강점기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도대불 축조시기에 대한 기록은 지난 2000년 발간된「제주 고산향토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책에 따르면 고산1리 해안은 오래 전부터 자구내포구로 불렸으며, 테우와 고깃배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현대식 포구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이다. 선착장과 방파제를 쌓기 위해 자구내포구를 찾은 일본인 석공의 지도로 주민들이 함께 돌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구내포구가 1932년 1차 완공됐으며, 1936년 2차 공사가 이뤄지면서 포구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고 한다.
 
고산리 도대불이 축조된 때는 자구내포구가 만들어진 이후로 판단된다.「제주 고산향토지」에서는 도대불이 '돌등대'라고도 표기돼 있다. 중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1년 일본인 석공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이 도대불은 고산과 목포를 운항하는 화물선이 자구내포구에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불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화물선이 자구내포구에 들어올 때 등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켜 도대불에 올려놨으며, 배가 들어온 뒤에는 불을 껐다고 했다. 또 도대불이 높아 등을 올려놓을 때 사다리를 이용했다는 내용도 있다. 도대불의 규모는 높이 285㎝, 하단 너비 190㎝, 상단 너비 87㎝로 기록됐으며, 현무암으로 축조됐다고 했다.
 
고산리 도대불에 대한 기록은 도시계획가인 이덕희씨가 1997년 펴낸「제주의 도대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일제시대 포구가 개발될 당시 고산리 도대불이 축조된 것으로 봤으며, 지역원로의 증언을 토대로 사다리를 이용해 도대불에 불을 놓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제주도가 파악한 제주도내 도대불 현황에서도 구체적이진 않지만 고산리 도대불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자구내 선착장과 방파제가 만들어지면서 도대불이 생긴 것으로 판단했고, 도대불 형태는 사다리꼴이라고 밝혔다.
 
△ 파손 복구과정서 일부 변형
 
▲ 2000년 발간된「제주 고산향토지」에 실린 고산리 도대불의 예전 모습.
고산리 도대불은「제주 고산향토지」에 기록된 것처럼 제주 포구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역사이자 유산이다. 하지만 고산리 도대불이 축조된 이후 어떻게 관리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일부 주민들의 기억을 토대로 추정할 뿐이다.
 
고산리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의 도대불 모습은 과거와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불의 원형이 훼손되면서 복구되는 과정에 일부 변형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43년 1월생인 고원해 할아버지는 "자구내포구에서 줄곧 살았는데, 어릴 적부터 도대불이 포구에 있었다"며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에 의해 지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고 할아버지는 "어릴 적에 도대불에 오르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처럼 시멘트가 발라지지 않고 돌로만 쌓여 있는 상태였다"며 "돌 틈을 밟고 도대불에 올랐었던 때가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 우측면도
▲ 정면도

고산리 도대불이 훼손되면서 복구작업이 이뤄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고 할아버지는 "예전에 도대불 맨 위에 있는 불을 놓는 부분이 일부 파손되자 내가 직접 시멘트를 발라 복구한 적이 있다"며 "최근에는 포구 확장공사를 하다가 크게 파손됐다가 복구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김수선 고산1리장도 "최근 포구 확장공사 과정에서 도대불이 차량에 부딪혀 파손됐었다"며 "그래도 주민들이 도대불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설자리 잃어가는 도대불
 
이처럼 고산리 도대불은 자구내포구가 조성되면서 축조된 이후 원형이 일부 훼손, 여러 차례 복구작업이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멘트로 보강된 점 등을 제외하면 지금의 도대불은 축조 당시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고산리 주민들의 증언이다.
 
문제는 70년 넘게 자구내포구를 지켜온 도대불이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구내포구에는 고산리 도대불을 가로막는 인공시설물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포구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도대불 하단부가 콘크리트로 포장, 과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더구나 차귀도 해양 수중공원을 알리는 거대 안내판까지 도대불 옆에 들어서면서 어업문화유산의 가치까지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 포구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어업문화유산인 고산리 도대불에 대한 체계적 관리가 절실하다.
<특별취재팀=사회부 김경필 차장 대우, 한 권·김하나 기자 / 자문=김태일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

김태일 제주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고산리 자구내포구에 살았던 주민들의 증언과「고산향토지」(高山鄕土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중일(中日)전쟁(1937~1941년)이 끝날 무렵 고산-목포를 오가던 목포화물선이 밤에 안전하게 입항하도록 하기 위해 축조되었는데, 당시 자구내포구 축조공사를 맡았던 일본인 석공이 축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인 석공의 도움을 받아 축조되었기에 다소 일본의 근대식 등대와 형태적 유사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전국 포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제주의 포구에만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일본의 근대식 등대를 모방해 건축했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즉 일본의 근대식 등대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가공하여 잘 다듬어진 석조를 쌓았던 일본의 근대식 등대의 축조법과는 다르게 거친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성층(成層)쌓기로 축조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근대식 등대의 경우, 본체의 아랫부분은 넓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져 다소 과장된 형태를 하고 있다.

반면 고산리의 도대불은 완만한 곡선미로 조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가로와 세로의 폭과 높이, 비례감 등에 있어서도 일본의 근대식 등대와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 등을 차이점으로 들 수 있다.

따라서 고산리 도대불은 현존하는 도대불 중에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어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가로와 세로의 비례감이 뛰어난 조형미를 평가할 수 있다.

구조물의 기본구성은 가로·세로 1.8m의 기단(基壇)과 높이 2.8m의 본체, 가로·세로 0.4m 크기의 점화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본체의 완만한 곡선미는 고산리 도대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초 자연석 성층(成層)쌓기로 축조되었으나 이후에 보수과정에서 자연석 사이사이를 흰색 시멘트로 마감하게 되면서 제주석의 검은색과 시멘트의 흰색이 묘한 조화를 이루게 되면서 독특한 의장(意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정면 중앙에 설치되었던 도대불이라는 희미한 글씨가 새겨진 판석들은 후대에 보수과정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다른 도대불과 달리 점화부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는 구조여서 사다리를 타고 점화를 했다고 전해진다.

고산리 도대불은 해안마을 사람들의 애환(哀歡)을 외롭게 지켜보며 자리를 지켜왔고 자구내포구 발달과 함께 역사적 상징물로 남게 될 우리의 어업문화유산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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