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① 조선시대의 제주사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베세토 라인'과 제주도

 새로운 천년을 여는 2000년 새해가 시작되었다.20세기를 마감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21세기는 세계화와 지방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 예견하였다.그런 의미에서 21세기를 ‘세방화(glocalization) 시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나아가 세계인들은 21세기 세계의 중심축으로 중국의 베이징(be),한국의 서울(se),일본의 도쿄(to)를 연결하는 3각 지점을 상정하고 있다.이를 소위 ‘beseto 라인’이라 부른다.세방화 시대와 베세토 라인,그리고 베세토 라인의 중간적 위치에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가 자리하고 있다.

 이제 제주는 역사의 변방이 아닌,중심축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역사적 전환기에서 우리는 제주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궁극적으로 제주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의 좌표를 설정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누가 언제 제주에 유배되었고,누가 제주목사로 부임해 왔으며,무슨 사건이 일어났고,제도가 언제 마련되었는가 라는 등의 단순한 사실 인식에 그쳐서는 안된다.

 보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역사상을 그려내야 한다.즉,무질서하게 널리 산재해 있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들을 하나의 실에 꿰어 전체적인 역사상을 제시하여야 할 시점이다.그럴 때만이 우리는 조선시대의 제주사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비춰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남육도(以南六道), 양계(陽界)

 조선시대의 지방통치는 역사적 전통과 지역적 특성에 따라 크게 이남육도(以南六道),양계(兩界),제주지역이 서로 상이하였다.이남육도는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강원도,황해도를 말하며,양계지방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지칭한다.행정구역상으로 제주도(濟州島)는 전라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전라도 지역과는 다른 대우와 통치를 받았다.즉,제주도는 평안도·함경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양반의 세력이 절대적으로 약했던 양계지방이나 제주도는 중앙정치 무대의 외곽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으며,따라서 사족세력(士族勢力)보다도 향임세력(鄕任勢力) 등 토착세력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다.그리고 두 지역에는 토관(土官)이라는 특수한 제도가 존재하기도 하였다.
◆ 중앙과 지방의 갈등

 우리는 좋든 싫든 ‘제주 사람’,‘섬사람’이란 소리를 듣게 된다.마치 제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처럼 인식되어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말(馬)은 제주로 보내라’라는 말까지 생겨나기도 하였다.그러나 제주에는 엄연히 제주라는 땅에 기반을 두고 삶을 영위해 온 제주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원심력과 구심력의 끊임없는 갈등과정을 거치면서 내재적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여기서의 원심력이란 제주인들이 중앙정부나 관권의 지나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향촌사회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며,구심력이란 지방통치의 기본방향을 중앙정부로 집중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주사회가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구심력과 어떤 대립·갈등을 거치면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여 조선시대 제주사를 바라 볼 필요가 있다.즉,중심부의 세력은 관권을 중심으로 제주사회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가고자 했고,제주지방세력은 제주향촌사회를 중심으로 제주사회를 주도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심지어 제주도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이러한 갈등을 잘 보여준다.즉,1601년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은 당시 문충기 등이 합세하여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고는 제주도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1813년의 양제해 모변도 이러한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당시 공무원 자리를 놓고 빚어지고 있었던 제주 사람끼리의 갈등은 얼마전 도백(道伯)의 선거에서 나타났던 신파(愼派),우파(禹派)로 편가르기식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인물 키우기에 냉정한 도민들의 잘못된 정서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수탈과 저항

 말(馬)의 생산지로 부상되면서 제주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고,그것은 제주인에 대한 중앙정부의 과중한 경제적 수탈로 나타났다.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모두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항상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 불리한 농업환경으로 인하여 흉년이 겹쳐 굶어 죽는 경우가 빈번하였다.조선 500여 년 간 제주의 인구가 5만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최근 제주 농촌의 주수입원인 감귤 또한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감귤이 익기도 전에 관리들이 장부를 들고 나와 감귤나무마다 그 열매의 수를 일일이 세어 기록해 두었다가 징수해 갔다.따라서 도민들은 고통을 주는 나무라며 밤에 몰래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어 고사시키기 일수였다.

 전복 등의 해산물 진상,한라산 곳곳에서 생산되는 약재의 진상 등 도민들의 경제적 처지는 매우 불안하였다.온갖 진상과 잡역(雜役)·잡세(雜稅)에 시달려야 했던 도민들은 한 사람이 열 사람의 몫을 해내지 않으면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1인 10역).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성종 때부터 계속된 도민들의 출륙은 급기야 출륙금지령(1629년)을 초래하고 말았다.

 특히,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제주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1813년의 양제해 모변,1862년(소위 강제검의 난),1898년(방성칠의 난),1901년의 민란(이재수의 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 문화의 연결고리

 제주는 결코 절해고도(絶海孤島)로 버림받아 온 섬이 아니다.동북아시아의 중심지역에서 주변의 다양한 문화와 문화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다 하였다.이 과정에서 중국이나 일본뿐만 아니라,서양의 문화가 유입되거나 주변지역의 정보를 중앙정부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표류와 표도의 기록은 수없이 많지만 1477년(성종 8) 귤 진상을 위해 한국 본토를 향해 출항했던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승선한 배가 태풍을 만나 유구국 윤이시마에 표류함으로써 유구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653년(효종 4) 일본으로 가던 하멜 일행이 탄 배가 제주 대정현 지역에 표착함으로써 서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아쉽기는 하지만 당시에 서양과 교역을 행하는 곳으로 제주가 이용되었더라면 보다 일찍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 드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제주는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예로부터 한국 본토의 문화와 중국·일본 문화의 직·간접적 영향하에 있어 왔다.이는 제주가 한국이면서 또 다른 한국으로 표현될 정도로 독특한 문화를 간직하게 된 요인이기도 하다.


◆ 제주·정의·대정의 문화권

 지역의 역사 및 문화를 논의하고자 할 때,피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지역의 범위를 설정하는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점이다.다행히 제주는 하나의 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고민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제주도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416년(태종 16)에 제주가 삼읍(三邑:제주목·정의현·대정현)으로 나누어진 후,1914년에 하나로 통합될 때까지 500여 년 간 제주는 크게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이 세 개의 고을이 각각의 생활 단위였던 셈이다.유림들은 각각 제주향교·정의향교·대정향교를 중심으로 그들의 힘을 결집하였고,주민들의 경제권,생활권,혼인권 등은 기본적으로 이 세 고을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주의 역사와 문화는 제주·정의·대정이라는 문화권을 어느 정도 설정하고 파악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최근 간혹 대두되는 제주의 행정구역에 대한 개편 논의도 어느 정도 이러한 문화권의 영향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결과인 것이다. <김동전·제주대 교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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