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오름 나그네] 43. 붉은오름 광령

▲ 노꼬메오름에서 바라본 붉은오름 광령 서면. 김철웅 기자
삼별초 최후 항전서 전멸해 '피로 붉어진' 전설
정상부 경관에 작아지는 인간…탐방 2시간10분
 
붉은오름 광령은 사람을 작아지게 하는 오름이다. 1273년 붉은오름에선 삼별초가 몽고에 저항하며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지도자 김통정 등 삼별초 잔류 세력 전원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긴 자나 진 자나 지금은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다. 죽자 살자 싸워서 이겼다고 얼마나 오래 즐길 수 있었을까. 참으로 짧은 게 인생이다. 오름에 오르니 왜 이리 허덕거리며 살고 있나 생각이 든다. 오름을 내려가면 이러한 마음도 스러져 다시 '속물'로 돌아가는 인간이겠지만 붉은오름에선 그래도 한라산 등 장엄한 풍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외쳐본다.
 
붉은오름 광령은 1100고지휴게소 북쪽 800여m 지점의 1100도로 상 한라산 해발 1000m 표석에서 서쪽으로 800m 떨어진 한라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주소는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 산18-2번지 일대다.
 
붉은오름 광령 탐방로 A=탐방로 입구 B=국립공원 경계표석 C=계곡 D=탐방로 갈림길 E=정상부 개활지 F=최정상 G=분화구 H=광령천 지류 I=광령천 본류 J=광령천 본류·지류 합류점 K=임도 L=붉은오름 안내판
붉은오름 광령은 가파른 오름에 속한다. 비고가 136m로 도내 368개 오름 가운데 37위인 반면 면적은 41만1978㎡로 82위로 높이에 비해 바닥이 상대적으로 좁다. 저경 812m에 둘레는 2473m로, 남사면은 가파르고 북·서사면으로 얕게 패여 내려간 말굽형 분화구(탐방로지도 G)를 갖고 있다.
 
한자로 불근악( 近岳·탐라지 1653년 등)·적악(赤岳·제주군읍지 1899)으로 표기됐던 붉은오름의 어원은 대략 2가지다. 1273년 항파두리에서 여몽연합군에 패한 김통정 장군과 휘하 장수 70여명이 산 넘고 물을 건너 남남동쪽으로 10㎞ 떨어진 이곳 붉은오름까지 퇴각한 뒤 최후의 항전을 하다 전멸하면서 온 산을 피로 물들였다 하여 붙여졌다는 게 첫째다. 둘째는 오름의 토질이 유난히 붉은 빛을 띠어서 붉은오름이 됐다는 설이다.
 
신제주로터리에서 붉은오름 입구(〃L)까지는 24.7㎞다. 평화로를 타고 15㎞를 가다 원동교차로에서 좌회전한 뒤 만나는 산록서로를 횡단, 바리메오름 방향 산길로 9.7㎞ 들어가야 한다. 족은바리메 입구를 기준으로 700m지점에서 좌회전, 임도(〃K)를 따라 6.2㎞를 동진한 뒤 붉은오름 안내판(〃L)이 세워진 곳에서 우회전해 200m 더 들어가면 붉은오름 탐방로 입구(〃A)다.
 
탐방로는 완전히 '자연산'이다. 인위적인 돌계단 하나, 그 흔한 타이어매트도 없다. 특히 붉은오름 광령은 정상부 일부를 제외하곤 울창한 숲에 뒤덮여 있어 그야말로 '여름형'이다.
 
문제는 탐방로가 희미한 구간이 많다는 점이다. 건천 같은 길을 올라가다 숲으로 들어가고, 다시 건천을 오르는 등 탐방로가 '일관'돼 있지 않고 조릿대 등 숲이 웃자라 탐방로를 덮어 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나무에 매달린 빨강·노랑끈 표식을 잘 따라가야 한다.
 
▲ 산수국. 김철웅 기자
탐방을 시작, 건천 같은 길을 13분 정도 오르면 첫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빠지는 데 입구 나무에 노랑끈으로 표시돼 있다. 숲길을 5분 정도 걸으면 꽃을 피운 뒤 죽어버린다는 '조릿대' 꽃들이 피어 있다. 쌀이 귀하던 시절엔 조릿대 열매를 쌀처럼 먹었다는 말에 씹어보니 다소 부실해도 식감이 쌀과 비슷하다.
 
출발한 지 21분 지나니 '공원보호구역'이라는 대리석(〃B)이 나온다. 국립공원과의 경계를 나타낸다. 다시 10분을 더 걸면 계곡(〃C)이다. 한라산 중턱에서 발원한 이 계곡은 2.5㎞를 북쪽으로 더 흘러 천아오름 남동쪽에서 광령천 본류(〃I)와 합류한다. 건천이긴 하지만 계곡이고 나무그늘도 있어 시원하다.
 
실은 계곡부터가 오름 탐방이다. 지금까지는 '어프로치'였다. 계곡을 건너 남동쪽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입구는 양쪽 나무에 노랑끈이 묶여 있어 찾기가 쉽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촘촘히 자란 조릿대 등을 헤집고 5분 오르면 정상부로 향하는 갈림길(〃D)이다. 어느 쪽도 괜찮지만 반시계 방향이 좋다. 남쪽 개활지까지 10여분 가파른 능선의 계속이다. 붉은오름 최대 난코스다. 참고 오르면 보람이 있다. 정상부 남쪽 개활지(〃E)다. 시원한 산바람과 함께 삼형제오름을 배경으로 살핀오름과 족은노로오름·노로오름과 멀리 한대오름 앞에 늦여름 진녹색 숲의 바다가 펼쳐진다. "우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정상부 능선을 따라 8분을 전진하면 표고 1061.0m 최정상(〃F)이다. 출발한 지 1시간10분 정도 걸렸다. 이곳에선 우람한 남성의 근육을 연살시키는 어승생을 시작으로 쳇망오름·어스렁오름·왕오름·볼레오름이 '자신들의 주인' 한라산을 배경으로 의연하게 늘어서있다. 수천·수만년을 이어온 장엄한 대자연의 풍광 앞에 수십년의 삶에 아등바등하는 인간이 모습이 너무나 작게 여겨진다.
 
▲ 붉은오름 광령 최정상 풍광. 멀리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김철웅 기자
"그래도 살아야지. 그래 조금은 굵게"라고 다짐하며 발길을 돌리면 내리막이다. 분화구의 동쪽과 북쪽 외륜을 타고 하산하는 형태이나 정상부 나무들이 웃자라 분화구 내부를 볼 수가 없다. 비스듬한 지형이 분화구임을 얘기해줄 뿐이다.
 
정상에서 갈림길(〃D)까지 20분이면 충분하다. 계곡까지 5분, 쉬는 시간 5분, 계곡에서 탐방로 입구까진 30분이다. 전체적으로 쉬는 시간을 포함, 탐방에 2시간10분 걸렸다.
 
붉은오름 식생의 경우 하단부 등에선 개서나무와 때죽나무·산딸나무·제주조릿대 등 일반적인 한라산 낙엽활엽수림과 유사하나 정상부로 향할수록 참빗살나무·아그배나무·산딸나무의 출현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말굽형 분화구의 정상을 따라서는 꽝꽝나무·좀쥐똥나무 등의 관목림이 형성돼 있고 탐방로 주변엔 개서나무·쪽동백나무·곰의말채·음나무·층층나무·때죽나무·대팻집나무·산뽕나무·산뽕나무·솔비나무 등이 주로 분포돼 있다.
 
김대신 한라산연구소 연구사는 "붉은오름은 한라산 낙엽활엽수림지역에 산림식생이 형성돼 있는 대표적 오름 중 하나"라며 "지리적 특성상 여름에는 백운란 같은 멸종위기식물도 드물게 접할 수 있고, 오름 하단부 계곡에는 한라개승마·솔비나무 등 특산식물도 관찰된다"고 말했다. 김철웅 기자
 
인터뷰 / 김일우 박사(역사연구가)
 
"붉은오름에서 최후의 격전을 벌였던 삼별초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끈질기게 외세에 대항한 고려 무신정권의 '자존심'이었다"
 
김일우 박사(문학·역사연구가)는 "삼별초는 강화도로 천도, 30년간 대몽 항전을 이끌었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항복한 왕정과 정치세력에 불복, 1270년 근거지를 진도로 옮겼다"며 "이후 1273년4월 제주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무신정권의 저항은 40년간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삼별초는 진도에서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에 패퇴하자 당시 전사한 배중손을 대신한 지도자로 부각된 김통정을 중심으로 제주에 들어왔다"며 "기록은 없으나 삼별초 패망 후 포로가 1400명이라는 기록 등으로 미뤄 입도 병력은 1만명 가까이 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제주에서 삼별초는 1년에 걸쳐 쌓은 항파두성을 거점으로 해안에 성을 쌓아 여몽연합군에 대비하는 한편 전라도와 충청·경기 연해안까지 군사 활동에 나섰으나 기간은 길지 못했다"고 밝혔다.
 
특히 김 박사는 "제주에서의 전투도 길지 않았다"며 "여몽연합군은 바다 건너오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삼별초를 순식간에 제압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김통정은 항파두성이 함락되자 70여명의 장수들을 이끌고 붉은오름 쪽으로 피신, 처자식을 죽이고 항전하다 전사했다고 전해진다"며 "전사인지 자결인지는 모르나 2개월 후에 산중에서 시체가 발견됐다는 사료가 있어 한라산에서 사망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 박사는 "사학계 논란 가운데 하나가 고려 무신정권의 대몽항쟁"이라며 "민족주의적 역사의식 관점에선 높게 보지만 현재의 민주적 관점에선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이유로 그는 "자기네들의 권력 유지 활동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주민과 영토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며 "특히 제주도민 입장에선 어느 날 갑자기 들어온 삼별초 때문에 항파두성 사역 등으로 고초를 겪는 등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김철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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