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2. 물질 도구

▲ 잠녀가 물 속 작업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 거친 숨을 내쉬고 있다.
작업복에 앞서 삶과 목숨을 지지하던 물건으로 의미 커
빈 박에서 스티로폼, 황동판에서 고무로 시대 변화 반영
특유의 어로도구 가치, 전승 노래나 기념물 등에도 등장
 
아마(海女)를 소개하는 일본 자료 중에는 그 시초에 대한 언급이 있다. '채집도구를 이용해 전복이나 소라, 해조류 따위를 채취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이란 점을 전제로 거슬러간 시작점은 기원전 1300년부터 400년까지의 조몬시대 중엽이다. 3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에현 도바시 우라무라(浦村)의 시라하마 유적에서 대량의 전복 껍데기와 함께 사슴뿔로 만든 전복 따는 도구(이와비오코시)가 발굴된 것을 아마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논리야 어떻든 그 기준이 된 것은 '도구'였다.
 
# 쓰임·사회 변화 따라 진화
 
물질을 하는데 있어 '도구'는 물옷에 앞선다. 맨 손으로 물 속 전복이나 소라를 채취하는 일이 쉬울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작업복' 개념의 물적삼이나 소중이에 비해 도구의 변화는 더디다. 하지만 잠녀들이 작업환경에 있어 물질도구는 삶과 목숨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대표적인 물질 도구에는 테왁 망사리, 족쉐눈, 세눈, 눈곽, 빗창, 개호미, 호맹이, 작살, 성게채, 성게칼, 질구덕 등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인 것은 테왁 망사리다. 노잠녀들의 기억을 정리하다보면 지금처럼 스티로폼을 쓰게 된 것은 1960년대 중반 이후다. 고무 잠수옷과 그 시기가 비슷하다. 한창 일본이며 뭍으로 출가 물질을 하던 때다. 어디서 어떻게 흘러들어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전 잘 여문 박을 따내 구멍을 뚫고 잘 말려 쓰던 것에 비해서는 수고도 덜하고 유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부력을 이용한다'는 개념조차 없을 무렵 '속이 빈 박'은 잠녀들의 목숨을 책임졌다. 바다에 나서는 일에서부터 물 속 작업에 지친 몸을 의지하거나 작업 위치를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물에 뜨는 뒤웅박을 작업에 이용한 것 역시 하나의 '민속지식'이다. 제주 잠녀와 유사하다는 일본 아마는 '오케'라고 부르는 나무광주리를 부이로 사용한다. 
 
▲ 잠녀 물옷과 물질도구(사진 왼쪽) 외도잠녀들이 테왁망사리를 손질하고 있는 모습(오른쪽).
백과사전 등에서는 '(망사리를 연결하기 위해) 테를 두른 박'이라는 뜻의 테박에서 'ㅂ' 탈락 현상이 일어나 테왁이 됐다는 설명을 하지만 잠녀들 사이에서는 '두리박' '똘박' '두룽박' 같은 명칭도 통용된다. 테왁은 잠녀들의 개성을 상징한다. 작업 위치를 보다 분명하게 표시하기 위해 형광색 테왁 보호망이 보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름 석자를 써넣어 소유를 표시하기도 하고 꽃 무늬천 등을 덧대서 '내 것'을 알린다. 물에서 쓰는 것이니 바느질이며 색이며 신경이 쓰일 만도 한데 해진 고무 옷을 수선하듯 테왁 보호망을 손질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비싼 고무옷 대신 테왁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잠녀도 많다. 바다 사정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사실 테왁의 크기는 물이 깊거나 물살이 센 것과는 무관하다. 토평어촌계 등 수확량이 많은 지역 잠녀들은 '200㎏짜리 테왁'을 쓴다. 보통 테왁의 4~5배는 됨직한 큰 크기다. 심지어 여기에 작은 테왁을 묶어가며 작업을 한다. 작업일수는 타 어촌계보다 짧지만 단시간 많은 양을 수확하기 위한 방편이다.
 
# 삶과의 사투 상징물로
 
지난 2011년 제4회 해녀축제를 찾았던 '제주 출신 잠녀' 김순덕 할머니의 짐 가방에는 소중한 보물이 있었다. 당시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제주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했지만 작은 종이 상자에 '족은눈' 하나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김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어린 여자아이들까지 산업인력은 물론이고 군인으로까지 징집되고, 빗창이며 개호미 같은 물질 도구도 '쇠붙이'라는 이름으로 죄다 빼앗기면서 당장 입 하나 줄이는 것이 급해졌을 때 무작정 청진행 배에 올랐다.
 
'이 해만 지나면 돌아 가려나'했던 것이 벌써 60년이 지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김 할머니는 고향에서 가져온 '족은눈'을 소중히 간직했다. '눈'을 쓰면 눈앞에 고향 바다가 펼쳐진다고 했다. 물질도구가 갖는 의미이기도 하다.
 
'눈'이라 부르는 물안경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소형 알이 두개로 분리된 '쌍눈'이었고 1960년대 이후는 분리되지 않은 외눈이 사용됐다. 쌍눈을 '족은눈' 또는 '족쇄눈' 이라 하고, 외눈을 '큰눈' 또는 '왕눈'이라고 불렀다. 또한 '큰눈'은 그 테두리의 재료를 처음에는 황동판으로 만들어 썼지만 1970년대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부터는 고무를 활용한 '고무눈'이 보편화됐다.
 
물질도구의 의미는 전승되는,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해녀 노래'들에서도 살필 수 있다.
 
도쿄행진곡의 음을 빌어 부르던 '해녀의 노래'에는 "…유리잔을 눈에다 부치곡 (유리안경 눈에 쓰고)/테왁을 가심에 안곡 (테왁을 가슴에 안고)/무쇠빗창 손에 찌곡(쇠로 된 빗창 손에 끼고)/지픈물속 들어보난 (깊은 물속 들여다보니)…"하는 구절이 나온다.
 
대평리 잠수들 사이로 전승되는 '출가해녀의 노래'는 "한손에는 빗창 들고/한손에는 호미 쥐고/…테왁 짚고 물에 떠서/생각생각 고향생각…"하며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달랜다.
 
지난해 세계적인 크로스오버 뮤지션인 양방언 작곡, 제주출신 소설가 현기영씨의 작사로 탄생한 '신(新) 해녀 노래'에도 "…우리집 대들보 나는 해녀/가슴엔 테왁 손에는 메역 호미/밀물과 썰물 해녀인생/어서가자 이어싸/물때가 뒈엇쪄"하는 부분이 잠녀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지속됐던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운동의 주체가 순수한 여성 집단이라는 점, 국내 최대 규모의 어민 투쟁이라는 점, 법정사 항일항쟁(1918년)·조천만세운동(1919년)과 더불어 제주 3대 항일운동이자 1930년대 최대 항일투쟁으로 평가된다.
 
구좌읍과 성산읍, 우도면의 잠녀 연인원 1만7130명이 참가했으며 집회와 시위 횟수가 238회나 되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적극 대응했던 상징적 공간인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일명 연두막 동산에 세워진 제주해녀항일기념탑에 세워진 잠녀 조각상의 손에는 태극기와 함께 빗창이 들려있다. 고 미 기자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