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무형문화유산을 만나다] 2.송당리마을제

송당리마을제 여성주도 무속적 마을제 전형
축제화 등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 필요성 부각
'마을제'는 제주를 '1만8000 신들의 고향'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치다. 마을제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에는 제주의 신화와 전설이 있다. '마을제'라는 형식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민속지식이자 복합 문화 콘텐츠가 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중 송당리 마을제는 마을의 본향당 당신인 금백조 여신이 제주도내 여러 마을에 당신으로 좌정해 있는 무신들의 조상이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현재는 그 존재가 남아있지 않은 여성 위주의 마을제인데다 무속적 성격을 유지한 것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당 신앙'의 뿌리, 불휘공
송당리마을제의 근원은 대표적인 제주도 신화 가운데 하나인 '송당 본풀이'에서 찾을 수 있다. 구전을 통해 전해진 본풀이는 현대에 와서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것이 됐다.
송당리는 제주 신화의 본향(本鄕)이자 고대 탐라국의 신시(神市)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송당리 마을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송당본풀이를 따라가 보면 서울 문명한 곳에서 자란 금백조(백주또) 여신이 제주에 들어와 한라산에서 솟아난 토착신 소로소천국과 혼인해 송당에 정착,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손지방상 368명이 제주 전역에 신당·신화 속 주인공으로 자리를 잡아 번성했다고 한다. 특히나 금백조는 아이들이 연이어 태어나고 성장하기 시작하자 남편에게 농사지을 것을 권유하며 제주에서 최초로 농경시대를 개척한 여신으로도 전해진다.
매년 음력 1월13일(신과세제)·2월13일(영등제)·7월13일(마불림제)·10월13일(시만국제) 행해지는 본향당굿에서 송당 마을 주민들은 선조 때부터 행해져온 방식대로 금백조 여신을 모시고 있다.
네 가지 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굿은 음력 정월 13일에 열리는 신과세제다. 이 날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준비해오고 남성 심방인 정태진 심방이 제의를 준비한다. 여신을 모시고 있어서 남성 심방을 고집하고 있지만 다음을 이을 심방이 없어 보존회의 고민이 크다.
금백조 여신에게는 소위 깨끗한 음식들만을 올린다. 대표적인게 돌레떡이다. 보편적으로 제주 제례에 많이 나오는 음식은 아니지만 하얀 색깔로 깨끗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메(밥) 두 그릇과 구운 생선, 과일, 삶은 계란 등을 올렸다. 도내 대부분 할망당처럼 이곳에서도 '돼지고기'는 금지 제물이다. 그 배경으로 농경문화의 신인 금백조 여신이 수렵목축문화의 신인 남편 소로소천국과 훗날 별거하게 된 내력을 꼽기도 한다. 실제 이 곳에는 이혼한 부부신이 각각 좌정한 웃송당(금백조여신)과 알송당(소로소천국)이 있다.
여유가 있는 집에선 치마나 저고리, 가락지 등 금백조 여신의 치장을 위한 것들도 제물로 올리고 있다.
마을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꿩메밀국수를 나눠 먹는다. 송당이 메밀 주산지라는 점과 더불어 '꿩' 등 조류를 고기로 치지 않았던 마을의 풍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본향당굿이 열릴 때면 송당봉향당은 대나무 구덕의 행렬로 장사진을 이룬다. 제주 신들의 기원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서부터 흔히 포착하기 힘든 무속제례의 전형을 찾는 학자와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
문화적 측면으로의 접근
자연에 순응하고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역할을 하던 마을제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대에 미신이라는 이유로 된서리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섬 밖의 마을제는 퇴화됐지만 제주는 그 명맥을 꾸준히 유지했고 1980년대 부활 과정에서 대부분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마을제를 위협한 것은 새마을운동 이전에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마을제가 치러지는 본향당의 퐁낭(팽나무)가 일제시대에 훼손됐었고, 4·3을 전후해 3년 정도 마을제를 치르지 못하는 등 수차례 단절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마을에 흉한 일이 생기거나 마을 관계자들이 '마을제를 지내라'는 예시몽을 꾸면서 다시 부활하게 됐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송당 마을제가 열릴 때면 타 지역에 시집을 간 송당 출신 여성들까지 다시 마을을 찾아 제물을 올리는 등 지역의 특수한 통과의례로도 명맥을 잇고 있다.
여성 주도의 무속적 마을제의 전형으로서 송당리마을제는 그 보존 가치를 인정받으며 1986년 제주도무형문화재 5호로 지정됐다.
원로 중심의 주류집단이 당을 관리하던 것에서 도무형문화재 지정 이후에는 보존·전승 등의 이유로 '마을제보존회'를 만들었다.
마을제 보존회는 예전부터 마을의 상단골로 당을 관리하는 광산김씨 후손들과 마을제 봉행, 당 관리를 맡고 있다.
마을제 보존 장치를 마련한 송당리 마을은 마을제를 단순 신앙적 측면에서 문화적 측면으로까지 옮겨갔다.
한 때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했던 당굿이 이제는 '문화유산'으로까지 그 접근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송당리마을제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바라보자는 움직임에 지난 2004년에는 문화역사만들기 북제주추진협의회·송당리 공동주최로 신화축제 치른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제주 신화가 지니고 있는 가치보다 평가 절하되는 상황에서 이를 문화예술로 끌어올리려 한 작업은 송당리마을제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전통문화 보존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마을 단위 당굿이 '축제'로의 가능성을 확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 축제는 일회성에 그쳤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행정과 마을이 축제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손발이 맞지 않았다는 점과 지자체의 무관심 등은 10년이 넘도록 해결과제로 남겨졌다.
김기범 송당리장은 "송당리마을제를 알릴 수 있는 방안으로 축제와 문화 콘텐츠 활용 등의 방안을 강구하고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며 예산 확보와 행정의 적극적인 협조 부분에서의 아쉬움을 토로했다.
기록화·콘텐츠 활용 필요
송당리마을제가 도무형문화재 지정 후 행정지원이 이뤄진 것은 우천시 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한 제장 시설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을제보존회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채 시설되면서 지금은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당의 좌향을 살피지 않은 채 제장을 시설하면서 당시 주민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지금까지도 정비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도지정무형문화재'라고는 하지만 본향당굿이 열리는 음력 정월 13일 말고는 행정과 도민들로부터 제대로 된 관심을 받기도 어렵다.
본향당을 관리하고 있는 김종호씨도 "제주에 있어 본향당은 뿌리나 마찬가지"라며 이를 후대에까지 전해주기 위해서는 마을은 물론 행정에서도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본향당굿이 열리는 날 외에는 본향당이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을 감안, '여신당'으로의 발길을 잇게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송당리마을제에 대한 지속 관심을 이끄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축제 콘텐츠는 물론 올레꾼과 블로거들 사이에서 마을제 관심이 두드러질 수 있도록 온·온프라인 콘텐츠 확보도 시급하다. 마을제가 미래 세대까지 원형을 잃지 않도록 이어지는 장치로 '기록화' 작업도 서둘러야 한다. 고혜아 기자
고혜아 기자
kha49@jem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