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5.지드림

▲ 구좌 하도리잠녀들이 요왕신 등에게 지를 올리고 있는 모습.
영등굿서 각자 준비한 제물 일부를 한지에 싸 준비
요왕신과 자신, 바다에서 목숨 잃은 집안사람 몫 등
어깨너머 전수, 자연 거스르지 않는 민속지식 계승
 
'올 한해도 잘 부탁 드렴수다'. 지를 싸는 잠녀들의 손이 부산하다. 한창 굿판이 벌어질 때만 해도 들썩들썩했던 분위기는 순간 진지해졌다. 벌써 수십 년째 해온 일이다. 손이 빠른 한 노잠녀는 아예 자신이 싸야할 지 숫자만큼 준비한 음식을 미리 나눠 십여 개를 척척 만들어낸다. 누가 언제부터 왜 그랬는지 아는 이는 없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정성'을 말한다.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
 
제주 바다에 비로소 봄이 들었다. 음력 2월 초하룻날 한림읍 귀덕리의 복덕개로 들어 온 영등신(할망)은 휘휘 섬을 돌며 '바당'을 들추고 새 계절에 들뜬 사람들의 옷깃에 훅 찬 기운을 불어넣다 15일 우도 진질깍을 통해 돌아갔다. 바닷가 마을마다 영등할망을 모시느라 부산을 떨어 섬은 온통 굿 판이 됐다. 비바람을 다스리고 바다에 해산물 씨를 뿌려주는 영등신 만큼 제주에서 귀하게 여기는 신은 없다. 연물가락에 흥이 돋는 영등굿은 '문화유산'이지만 잠녀들의 온갖 정성을 꽁꽁 동여맨 '지'는 '민속지식'이란 이름으로 이어진다.
 
▲ 한 잠녀가 바닷가 돌 밑에 지를 넣고 있다.
지난 13일 구좌읍 하도리 각시당에서 치러진 영등굿에 손옥희 상군 잠녀(63)는 전날 작업에서 채취한 소라와 군소를 내놨다. 매년 동네 대표들이 조금씩, 손 잠녀처럼 상군잠녀들이 조금씩 바다에서 거둔 '물건'을 내놔 영등신(할망)을 위한 상을 차린다. 비용은 잠수회비 등으로 충당한다. 지난해와 올해 각시당 영등굿은 문화재청 '생생문화재'사업 일환으로 진행되며 적잖은 지원을 받았지만 그 외에는 잠녀별로 2만~3만원씩 각출해 영등굿을 치렀다.
 
손 잠녀는 올해로 36년째 지 3개를 싸서 바다에 올린다. 1개는 요왕신(할망) 몫이고, 1개는 자신을 위해 쌌다. 나머지 하나는 27살 되던 해 자신을 두고 바다로 간 남편의 몫이다.
"지를 쌀 때는 올 한해도 건강하게 잘 보살펴 달라고 빌지. 처음에는 지를 쌀 때 운 적도 있지만 지금은 안 그래. 잘 살펴줘서 이렇게 잘 사는데 더 뭘…"
 
물질이 그랬던 것처럼 지를 싸는 것도 어깨 너머 배웠다. 손 잠녀는 "어머니가 '요왕신께 1년 무사하게 해 달라'하며 지를 드리고 정성을 올리는 걸 보고 따라 했다"고 귀띔했다.
 
그 의미는 매년 더 간절해진다. 손 잠녀는 "내게 바다는 직장이야. 물질은 직업이지. 밭 농사를 해서 아이를 키우기는 힘든 사정이었지. 당장 몸이 힘들어도 바다에 나가면 내 손으로 벌어먹을 수 있었거든"했다. '머정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상군이 됐다. 바다에서는 한껏 대우를 받는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가끔 놀러오는 손자에게 용돈을 쥐어줄 요량으로 바다에 간다지만 그 자부심은 대단하다. 손 잠녀는 "물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에는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며 "누가 뭐라고 해도 평생 해 온 '내 일'"이라고 강조했다.
 
▲ 영등굿을 마친 잠녀들이 각자 준비한 제물로 지를 싸고 있다.(사진 왼쪽) 지를 담은 구덕.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전통
 
'지'는 잠녀만이 아니라 제주 풍습이다. 전체 무속문화 속에서는 '용왕밥'으로 통칭된다. 바다와 연관이 깊다보니 잠녀들을 통해 전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제주의 영등굿에서는 마지막 제차로 지드림이 진행된다. 잠녀들은 자기가 차려온 제상을 적당한 자리에 갖다 놓고 여러 제물을 조금씩 떠 지를 싼다. 구좌읍 하도리에서는 메와 과일, 삶은 계란을 올린다. 영등할망 상에는 온갖 해산물이 다 올라가지만 개인적으로 준비한 제상에는 구운 생선 외에는 바다와 관련 된 것을 준비하지 않는다. 식구 수 대로 '10원 짜리 동전'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김현순 구좌 총 잠수회장(58)은 "계란과 동전은 모두 정성을 의미한다"며 "지에 쓸 동전을 일부러 모아두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마을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해산물 씨를 상징하는 돌을 지고 나르는 잠녀.
제주에서만큼은 개인별로 여러 개 지를 만든다. 집마다 적게는 2개, 많게는 예닐곱 개의 지를 싼다. 요왕신과 바다에서 죽은 집안 사람의 영혼을 챙기기 때문이다. 잘 싼 지는 바다에 던지거나 바닷가 돌 밑에 넣는 형태로 헌식한다. 일부 마을에서는 아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지를 바다 물 속 돌 밑에 넣어두기도 한다. 이렇게 하는 1차 목적은 요왕을 잘 위하는 것으로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원을 염원하기 위함이다. 2차 목적은 물질 작업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담보다.
 
이는 영등굿에서도 마찬가지다. 보통 제례에서는 두 번, 전통 혼례에서는 세 번 절을 한다. 제례의 절 두 번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에 대한 구분과 동시에 망인에 대한 예의로 해석된다. 전통 혼례에서는 신랑신부가 조상과 부모, 하객에게 절을 하는 것으로 예식을 마쳤다. 합근례라고 해서 신랑신부가 3번 술을 나눠 마시는 풍습도 있었다. 그 중 첫 째 잔은 지신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고시레'하는 잔이고, 둘째 잔과 셋째 잔은 표주박에 담아 나누어 마심으로써 부부의 화합을 기원하는 잔이라고 했다.
 
영등굿에서는 네 번 절을 한다. 요왕신(할망)과 영등신(할망), 선왕제, 몸제를 위한 것이다. 이중 몸제는 잠녀가 스스로 몸을 구하기 위한 의식이다. 직접 싸는 '지' 중 하나도 역시 같은 용도다.
 
영등굿 제차 중에는 잠녀들이 돌을 지어 날라 바다에 던지거나 생쌀 또는 좁쌀을 바다에 뿌리는 행위도 있다. '씨뿌림'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각종 어류나 해초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잠녀들의 행동에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룬 것이 없다. 민속지식으로 이어진 것들 중 어느 것도 자연에 거스르는 것이 없다. '지'도 마찬가지다. 고 미 기자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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