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마을공동목장사] 3.유수암공동목장 ②

▲ 유수암공동목장조합은 목축시설 외에 설립 당시인 1930년대 작성된 '문서'들이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끈다. 사진은 유수암공동목장 전경. 김봉철 기자
오랜 목축전통 간직…옛 조합문서 등 사료도 풍부
목축전시관 등 목장 유지·목축문화 전수 방안 고민
 
유수암공동목장조합은 방풍림이나 윤환방목 경계림, 급수시설, 관리사 등 목축시설 외에도 설립 당시인 1930년대 작성된 다양한 조합문서들이 현재까지 보존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일제강점기 등장하기 시작한 마을공동목장조합의 설립 배경과 운영실태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사료로 가치가 높아 체계적 연구와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제 축산정책과 공동목장
 
유수암리 지역에서 공동목장조합이 설립된 것은 1930년대지만 전통적으로 목축업이 발달했던 지역 특성상 그 이전에도 공동목장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에 도내 대정면 상모리(1914), 구좌면 송당리(1919)·하도리(1917) 등에 공동목장이 설립된 사실이 확인됐고, 그보다 앞선 조선시대에도 주민들에 의해 목축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도내 많은 지역에서 유사 공동목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 유수암공동목장 내 물저장시설.
유수암리가 속한 5소장 등 중산간 국영목장지대를 제외한 마을 인근 해안지대 역시 마을주민들이 자유롭게 공동으로 방목했던 목축지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축산물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제주지역에 마을공동목장조합을 결성하도록 하면서 유수암공동목장을 포함한 많은 공동목장이 들어서게 된다.
 
이를 위해 일제는 앞으로 설립될 목장조합에 대해 보조금 지급, 가축개량 기술지원 등을 약속하며 조합설립을 독려했다. 아울러 일제는 목장조합 규약의 제정과 변경 및 조합운영에 필요한 경비징수와 관리에 개입하면서 궁극적으로 목장조합을 통해 제주지역 각 마을을 통제하려고 했다.
 
문서로 보는 목장조합운영 실태
 
유수암마을 목장조합도 이같은 흐름의 연장선에서 1935년 설립인가를 받는다. 유수암리사무소에는 당시 작성된 문서들이 일부 남아 있어 목장조합의 운영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공동목장조합 설립승인부터 시작해 조합 규약 제정, 목장용지 확보, 목장내 목축시설 설치 등 일련의 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로 평가된다.
 
특히 1936년 5월 작성된 「금덕리목장조합결성서」는 강희경(姜熙慶) 초대 목장조합장이 목장조합 설치과정을 기록한 문서로, 목장조합의 구체적인 설립과정을 기록한 보기드문 사문서에 해당한다. 또 조합 평의원회가 조합규약을 변경하거나 조합경비를 징수하는 방법, 방목우마를 관리했던 목감제도, 조합원 제명 절차 등 구체적인 운영도 상세히 기록돼 있어 눈길을 끈다.
 
이들 문서들은 1930년대 목장조합의 생생한 운영모습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지만 작성된 지 무려 70년이 경과된 문서들이라 훼손속도가 빨라 이에 대한 고민도 주문됐다.
 
마을 목축유산 보호 노력도
 
유수암리는 특히 개향초부터 목축이 생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온 '목축의 고장'이다.
 
마을 향토지를 보면 조선초인 1400년부터 알게 모르게 사목장이 설치돼 개인적으로 우마를 키우는 것을 인정한 기록이 있고, 1429년 우마에 의한 농작물 피해로 10소장이 만들어질 때는 5소장에 속한 지역인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종마는 아무리 좋아도 3년 이상 쓰지 말라', '말도 8촌까지는 안다'처럼 오늘날 육종학의 원리와 딱 들어맞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고장이기도 하다.
 
유수암리는 이같은 목축전통을 보전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기록·유산에 대한 보호가 잘 이뤄진 편이다.
 
여기에 공동목장조합도 일정 부분 기여해왔다는 평가다. 조합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각종 문서를 80년째 이어오는가 하면 지난 2010년 마을의 역사를 총망라한 향토지 「유수암리지」 발간에 1000만원을 내놓기도 했다.
 
앞으로는 마을의 유산인 공동목장을 지켜나가는데 힘을 모은다는 방침이다.
 
현재 일부 조합원에 의해 목축이 유지되고는 있지만 조합원 대부분이 축산업을 떠난 현재, '목축'만으로는 후손들에게 공동목장의 원형을 물려주기 어려울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민이 바탕이 됐다.
 
특히 조합 관계자들은 목장 유지의 관건이 '조합원의 이익'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목장 원형을 보전하면서도 목장의 일부나 인근에서 체험관광, 목축전시관 등을 운영, 조합원에게 꾸준한 수익을 돌려줄 수 있어야 미래에도 목장을 지켜낼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김봉철 기자
▲자문단=강만익 문학박사(한국사)·문화재전문위원, 좌동열 문화관광해설사

강철호 유수암공동목장 조합장은 "우리 마을은 유수암 8경의 첫째로 '상장목우'(上場牧牛)가 꼽힐 만큼 목축 전통이 면면히 내려오는 곳"이라며 "선인들의 정신이 후손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기 위한 방안을 찾는데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조합장은 "마을의 유산인 공동목장을 팔아서도 안되겠지만 그대로 두기만 하는 것도 곤란하다"며 "조합원들의 소득 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면 훗날 개발의 유혹에 취약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동목장의 원형은 보전하면서도 목장 전체 유지를 위한 일부 활용은 가능하다고 본다"며 "말과 소가 뛰노는 수려한 경관을 이용한 체험관광이나 야영·산책 코스 등 여러 방안을 생각해봤다. 하지만 아직까지 행정의 지원이나 투자 없이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아쉬워했다.

▲ 금덕리목장조합결성서
당시 운영모습 파악 사료
구성원·규약·경비 등 기록

유수암 지역에 남아 있는 공동목장조합 문서들은 당시 목장조합의 운영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먼저 「금덕리목장조합결성서」(1936.5)를 보면 목장조합 설치 후 임의로 한라산에 방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1935년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과 군사령관이 제주도를 순시하면서 앞으로 제주지역 마을공동목장에 민마와 군마를 함께 방목하겠다는 계획을 수용하기 힘들다고 밝힌 대목도 나온다.

또 금덕리는 토질이 척박하고 마을사람들이 가난해 소와 말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에 협심해서 공동목장을 만들어야 하며, 관청서류를 보면 공동목장 설치예정 면적이 300 정보나 되지만 실제로 목축지로 이용가능한 면적은 80여 정보에 불과하다.

또한 목장예정지 내 토지소유자들이 높은 가격에 토지를 조합에 매도하려고 하면서 서로 흘겨보는 상태가 되고 있어 우애롭게 화합해 목장조합 결성에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금덕리공동목장조합명부」(1936.12)에는 조합비(두수할) 납입 고지서번호가 1호부터 187호까지 돼있어 모두 187명에게 금액이 청구됐음을 알 수 있다.

또 「금덕리공동목장조합평의원회 회의록」(1937.1.10)에는 조합장(의장) 1인, 부조합장 1인, 평위원 10인 그리고 참여원인 간사와 서기 각 1명 등 모두 14명이 평의원회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금덕리공동목장조합규약」(1937)에는 공동목장에 목장 경계 축조, 목도(牧道) 개수와 장애물 제거, 공동목사와 간시소(看視所), 급수시설 설치 등이 가능함을 명시했다.
「금덕리공동목장조합경비분부수입방법」(1937)에는 조합비로 조합원할 1인당 20전, 두수할은 성우마 1두당 20전을 징수했음을 적고 있다.

「현금출납부」(1936~1937)는 조합의 구체적인 운영모습을 기록한 문서로, 조합비 징수내역, 제주도농회 보조금액, 감목료(監牧料)등이 상세히 기록됐다.  강만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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