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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사회/복지 제주4·3, 어둠을 넘어 빛의 역사로
54년만에 '폭도'에서 '희생자'로<1부>진상규명활동 7. 4·3위원회
김영헌 기자
입력 2014-04-06 (일) 17:05:35 | 승인 2014-04-06 (일) 17:07:33 | 최종수정 2014-04-06 (일) 19:25:48
2002년 11월 전체회의서 1715명 첫 결정
심사기준 마련 등 심의과정에서 고비 많아
수형자는 물론 사형수·무기수까지 포함돼
 
   
 
  ▲ 2005년 3월17일 4·3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수형자 606명 심의안건이 전격 통과된 후 굳은 표정으로 박수치는 모습. 오른쪽부터 탁재승 변호사, 이해찬 총리, 김태환 지사, 김삼웅 위원.  
 
4·3특별법 제정 이후 4·3진상규명활동은 2000년 8월28일 특별법에 근거한 출범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이하 4·3위원회) 중심으로 이뤄졌다.
 
4·3위원회는 4·3사건진상보고서를 확정했고, 이를 근거로 노무현 대통령의 4·3에 대한 공식사과를 이끌어냈다.
 
무엇보다 50여년간 말조차 꺼내보지 못한 채 한을 품고 살아온 도민과 유족들에 대한 실질적인 명예회복 조치로 정부 차원의 4·3희생자를 인정함에 따라, 그동안 '폭도'로 매도됐던 4·3희생자와 유족들이 '희생자'로 명예를 되찾게 됐다.
 
하지만 4·3희생자와 유족들의 '희생자'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어려움들도 뒤따랐다.
 
4·3위원회는 지난 2002년 11월20일 김석수 총리 주재로 제5차 전체회의를 열어 '제주4·3사건희생자심사소위원회'(이하 심사소위)의 사전심사를 거쳐 상정된 희생자 및 유족에 대한 심사를 실시, 처음으로 제주4·3사건 희생자 1715명을 의결 결정했다. '폭도'에서 '희생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4·3위원회는 지난 2007년까지 희생자 1만3564명과 유족 2만9239명을 심의·의결했고, 그 이후도 심사가 계속 진행돼 현재까지 4·3희생자는 1만4032명, 유족은 3만1253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지난 2012년 12월1일부터 2013년 2월28일까지 4·3희생자 및 유족을 추가로 접수한 결과 희생자 326명과 유족 2만8426명 등이 신청해 현재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4·3실무위원회 심의를 거쳐 제주4·3중앙위원회로 접수된 이들 추가 희생자 및 유족들에 대해 심사소위원회가 4차례 심사를 개최해 희생자 200명과 유족 2만7973명을 의결했다.
 
희생자 심사과정에서는 몇차례 큰 고비들이 있었다. 먼저 사실상 희생자 심사를 주도했던 심사소위에서 희생자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심사기준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결국 4·3위원회 전제회의에서 4·3특별법의 제정 취지를 살려 희생자 범위를 최대한 폭넓게 인정하되 희생자 제외대상을 4·3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 등을 정했다. 다만 이같은 경우에도 입증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는 심사기준안의 의결됐다.
 
심사기준이 마련된 이후에도 수형자와 사형수·무기수에 대해 희생자 적용 여부를 놓고 법무·국방장관과 논란이 일었지만 결국 이미 만들어진 심사기준에 따라 희생자에 포함됐다. 김영헌 기자

"4·3희생자 심사기준 마련 가장 큰 고비"

인터뷰 / 임문철 4·3위원회 위원

"수형인 포함 여부 논란
노무현 정부 시절 처리"

   
 
     
 
"4·3희생자 심사과정에서 대원칙인 심사기준 마련이 가장 힘들었다"

임문철 4·3위원회 위원은 "4·3희생자심사소위에는 군경측 위원도 포함돼 있어 처음부터 심사기준을 놓고 논란이 많아 어려움이 많았다"며 "하지만 심사소위에서 심사기준이 정해진 이후에는 몇차례 고비는 있었지만 큰 원칙에 따라 희생자 심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말했다.

또 임 위원은 "심사소위서 심사기준 마련 당시 보수단체들이 제기한 4·3특별법 위헌심판 청구를 헌법재판소가 각하 결정하는 과정에서 예시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기준' 때문에 논란이 커졌다"며 "결국 희생자 제외대상을 정하고, 제외대상에 포함되더라도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정했다. 이같은 원칙에 따라 명백한 증거자료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에는 희생자로 선정한 후 반증자료가 나오면 재심사를 할 수 있다고 결정해 희생자 범위를 헌재의 예시보다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임 위원은 "심사과정에서 또 다른 논란은 수형인 포함 여부였다"며 "하지만 군사재판 자체가 적법성에 문제가 있는 '불법군사재판'이라는 논리로 반대측을 설득했고,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 법무장관이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해 결국 희생자로 포함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서는 처리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 위원은 또 "4·3과 관련 최고 의결기구인 4·3위원회는 4·3진상조사보고서 확정과 대통령 사과라는 성과를 이끌어냈지만, 그 이후에는 4·3해결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대표적으로 4·3평화재단 출연금과 4·3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의결해 놓고 재정 등의 이유로 정부가 반대하자 스스로 축소시키는 자가당착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영헌 기자  cogito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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