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화유산 제주잠녀] 6부 제주해녀 문화 목록 9. 잠수회

생산공동체에서 자치 조직으로, 어촌계 편입 약화
'공동 성과와 개별 성과 공존' 속 협업 시스템 구축
갯닦이·해녀의집 운영·물질 공연 등 역할분담 강조
"전복도 한 짐, 구젱기도 한 짐 허는 대상군이 뒈라이"
물질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잠녀들 끼리 기술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중·하군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것은 하나의 지위였다. 그렇다고 단순한 상하 조직이었다면 '박물관'취급을 받을 리 없다. 그들이 지닌 공동체 문화는 '조직'을 우선한다. 사람을 키우고, 바다를 관리하며 하나의 문화를 만들었다.
시대 따라 변하는 물질 특성 반영
잠수회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생산 공동체적 성격으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던 것이 세월을 타며 자치조직으로 성격으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어장관리 같은 이유가 달렸던 것은 아니지만 바다를 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 규칙이란 것이 필요했다. 물질 특성상 개별작업이면서 동시에 공동 작업이란 점은 잠녀들을 하나로 묶는 이유가 됐다.
물질은 철저히 잠녀 개개인의 뜻과 능력에 따라 이뤄지는 것으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노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마을 어장은 사정이 다르다. 잠녀들이 공동으로 관리해야 하는데다 바다에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공동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안전을 확보했다.

처음에는 한정된 바다를 효율적인 이용하고 위험 부담을 줄이는 것에서 시작됐던 것은 이내 작업 또는 어업권의 획득에 위한 조직 구성 필요성으로 이어졌다. 이웃 마을과 어장 싸움이 있을 때도 잠녀들은 똘똘 뭉쳐서 대처했고, 새로 마을에 들어온 잠녀의 입어권을 어떻게 인정해줄 것인지, 마을을 떠난 잠녀의 입어권을 언제까지 묵인할 것인지 하는 부분도 함께 의논해서 처리했다. 바다에서 캐낸 생산물도 철저히 상의하면서 한결같은 조건으로 판매가 이뤄졌다.
회원 자격 등이 엄격해지면서 잠수회의 회의 개최나 정관이나 규약 제정 같은 움직임도 생겨났다.
하지만 '어촌계 편입'이란 과정을 거치며 잠수회의 역할 역시 상당부분 희석됐다.
1962년 만들어진 수산업법은 어촌계의 설치규정과 어장의 소유권을 어촌계에 뒀고, 1975년 관련법 개정으로 공동 어장 관리권이 어촌계로 위임되면서 잠수회도 어촌계에 편입됐다. 어촌계 편입 이후 잠수회의 자율성은 사실상 훼손됐다. 수협을 통해 출하하도록 규정하면서 작업한 물건의 판매에 있어 어촌계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안됐다. 결국 어촌계 하위구조로 어촌계 사업과 성립 목적을 돕는 역할에 그치는 등 한계를 지니게 됐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잠수회별로 가입 기준이나 공동작업 배분 조건, 수익사업 참여 방법 등에 대한 약속을 정한다. 잠녀에 경사가 있을 때 물질 대신 역할을 맡아 일을 돕기도 하고 조사가 있을 때는 한 며칠 바다에 들지 않는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공동기금 조성을 통해 여행을 하거나 영등굿 등 큰 행사 비용을 마련하는 것에 의견을 모은다.

학교바당에서 할망바당으로
20년 전만 해도 잠수회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학교바당'이였다. 힘들게 물질해서 모은 돈으로 해방 후 초등학교와 마을공동시설을 지어줬다는 얘기를 바닷가 근처 마을이라면 한 두 개쯤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1994년 남원읍 태흥2리 잠녀들이 잠수회를 중심으로 '사랑의 소라 모으기 운동'을 벌여 심장병 어린이 도운 이야기가 언론에 소개되며 화제를 모았다.
2000년 초반에는 월령리 잠수회가 고령의 잠녀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물질한 물건을 공동분배하기도 했다. 당시 월령 잠녀들은 1985년부터 공동작업을 하는 속칭 '검등머리'해안 일대에서 채취한 소라 등 어패류 판매액을 똑같이 나눴다. 몸이 아파 공동작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잠녀들에 대해서도 벌금을 물리지 않는 등 70·80대 고령 잠녀들을 배려했다.
몇 해 전인가 가파도에 '할망바당'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가파도 어촌계 소속의 65세 이상 잠녀들만 물질을 하는 수심 4~5m 깊이의 얕은 바다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곳에는 상군 잠녀는 절대 걸음하지 않는 대신 고령 잠녀들의 생계를 위해 자망어업으로 잡힌 8㎝미만의 잔소라를 넣어둬 먼 바다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물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할망 바다'는 그러나 좋았던 취지와 달리 그리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물 아래 내려가 밥도 해 먹고 올 것"이란 말과 함께 전설로 불리었던 성산어촌계의 한 노잠수는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물질 공연도 참여하고 해녀의 집도 지켰다. 이유는 단순하다. 잠수회가 정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배운 게 이 것뿐인데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계속해야지. 누구에게 손을 벌리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하는 할머니의 말에 다 큰 손자도 설득을 포기했다.
순번을 정해 공동어장을 지키는 것도, 해안 정비를 하고 갯닦이를 하는 모든 것도 잠수회가 정한대로 움직인다. 제주도가 지원하는 고무옷 배정도 잠수회를 통해서 한다.
잠수회에서는 그들 특유의 '게석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아직은 바다가 서툰 아기 잠녀들의 망사리나 오랜 세월 바다 밭을 일구고 지켜온 노잠녀의 망사리에 한 웅큼 물건을 퍼 주는 '게석'은 잠녀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응원과 격려의 상징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주목받고 있는 '협업'역시 잠수회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잠녀 사회의 특징은 공동목표를 지향하면서도 나름 경쟁의식이 작용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톳 채취는 공동입어를 하고 판매·분배를 공동작업으로 하지만 그 외의 해산물은 각자 채취하고 개인 소득이 된다. 이처럼 공동의 성과와 개인별 성과가 공존하면서도 전체의 이해를 해하지 않는 것을 고도로 진화된 조직 형태로 읽는 사례도 있다.
아쉬운 것은 한 때 마을에 큰 일이 있을 때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지역 경제를 움직이던 핵심(학교바당)에서 지금은 보호가 필요한 존재(할망바당)로 위치가 옮겨간다는 점이다.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중요한 흔적들을 없었던 일 인양 잊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고 미 기자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 합니다.
고 미 기자
popmee@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