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여든 살이 된다는 조일약품 김기준 회장은 스스로 조금씩 생을 정리하면서 산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말과는 달리 안경 너머로 내 비치는 시선에선 스무 살 무렵의 열정이 감지된다. 그것은 이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누군가를 위해 그가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김기준 회장의 원래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이다. 3남4녀의 둘째로 태어난 김 회장은 서울약대를 졸업하고 성남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인텔리였고 평탄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은 한 민족의 역사는 물론 김 회장의 개인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남진해 내려오는 북한군에 쫓겨 부산을 바라보고 피난선에 몸을 실었지만 피난민들로 득실거렸던 부산은 김회장 일행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피난선에서 한번 내려보지도 못한 채 김회장 일행은 제주까지 밀려들어 온 거였다.

그러니까 김회장과 제주와의 인연은 완전한 우연인 셈이었고 그야말로 막막한 삶이 김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가친척은커녕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는 타인의 고향에서 삶을 꾸려나가기가 어디 간단한 일이던가.

“당장 끼니부터가 걱정이었지. 하지만 이곳 제주 사람들 그렇게 인심이 후할 수가 없어. 그 어려운 시절에도 선뜻 자신들 밥을 내어주는데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닌 거야. ‘낭푼’이라는 데 밥을 가득 담아서 그걸 함께 나눠 먹었어”
김회장은 1951년 당시 오성직씨가 운영하던 후생약방에 취직하고 얼마 안 있어 후생제약사 공장장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회사가 부도나자 1953년 독립을 결심한다. 비록 빈 상자가 겨우 덩그렇게 놓여 있는 초라하고 궁색한 시작이었지만 약국을 찾는 환자를 대하는 김회장의 모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점심을 거르는 것이 다반사였어. 그럴 때면 우유에 날계란 푼 걸 홀짝 마시는 걸로 식사를 대신하곤 했어. 가게를 찾은 환자를 절대 그냥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신조였으니까”

열심히 일한 결과는 또한 정직하게 되돌아 왔다. 약국은 조금씩 커져갔고 도내에서 알아주는 약국으로 성장했다. ‘돈도 많이 벌었겠군요’라는 짓궂은 질문에 김 회장은 “돈만 보고 사업을 했으면 지금쯤 재벌은 아니더라도 갑부쯤은 됐을 것”이라며 “하지만 사람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기 시작하면 추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라며 반문했다. 남루하게까지 보이는 김 회장의 옷차림에서 돈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저 의례적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업이 번창하면 할수록 김 회장의 가슴속에선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점점 더 커져갔다. 왜냐하면 성공이라는 것은 결코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이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음으로 양으로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늘 곱씹으며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떻게든지 그 고마움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싶었다. 밥을 못 먹는 사람에게 밥을, 학비가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대주는 등 주위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한편 맹아학교와 교도소의 제소자 교화사업에도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부지런한 봉사활동에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일부가 아닌 제주도민 전체에게 보답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까 궁리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새마을 문고사업이었다. 

중학교 선생님 출신인 김 회장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더 많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건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공부를 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운명도 함께 결정된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바른 길을 놓는 데 빠져서는 안될 문고사업은 말처럼 쉬운 사업이 결코 아니었다.

“문고 사업이라는 게 참 어려운 사업입디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이 좋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하면서도 막상 부지런을 떨어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문화사업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요”

1980년부터 그렇게 혼자서 외롭게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문고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마을 주민들이 사재를 털어 새마을문고를 만들기도 하고 행정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2001년 현재 250개 마을 중 144곳에 새마을 문고가 개설되었고, 내년까지는 활동이 미비한 부진문고를 털어 내고 150개 문고를 만들 예정이다. 인구 50만에 이만한 숫자의 도서관을 갖고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성과다.

“위대한 제주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이 문고사업의 성패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책을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은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고사업은 제 필생의 사업입니다. 따라서 나의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이 사업을 해야죠”

김 회장의 사무실은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다. 요즘도 한 달에 스물 권 이상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어떤 건지 궁금했다. 김 회장은 책상 서랍에서 세월의 더깨가 쌓인 책 세 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모두가 김 회장에게는 성경과도 같이 소중하다는 철학자 안병욱씨의 책들이었다.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에 김 회장은 조금은 겸연쩍어하며 “이 책에 실려있는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주옥같은 글이라 뭐 하나를 꼬집어 얘기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더니 세 권의 책 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펴고 한 구절을 나지막한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고, 일하는 것이다”

김 회장이 손에 든 책의 제목은 안병욱 에세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었고 그건 묘한 상징처럼 다가왔다. 물론 배우고 사랑하고 일하는 것만이 산다는 것의 전부가 아닌지도 모른다. 인생에 정답이란 없는 거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 세 가지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척도라면 김기준 회장은 그야말로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었다. 겨우 제 몸 하나 추스르는 데도 눈에 핏발이 서도록 아등바등 사는 많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면서.<글=김윤권 기자·사진=조성익 기자>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