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명숲 곶자왈 연대기] 8. 곶자왈 변천사 - 세월따라 삶과 죽음 흐르다

▲ 서우봉에서 바라본 함덕리. 조선시대 우진곶으로 기록된 곶자왈이나 지금은 주택지가 들어서 있다.
제주인구 증가 더불어 곶자왈 훼손 심각성 가속화
일제강점기 이후 벌채·화전 등으로 대부분 사라져
골프장 등 대규모 개발 인한 피해 자연 복원 안돼
 
증가하는 인구, 훼손되는 곶자왈
 
곶자왈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나는 중산간 마을마다 옛 집을 새롭게 꾸민 카페나 가게·민박집이 부쩍 눈에 들어온다. 제주를 찾는 다른 지역사람들이 늘면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한때 절해고도 유배지처럼 느껴지던 제주가 이제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곳이 된 듯하다. 마을분위기가 밝아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채워진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하지만 제주로 이어지는 발걸음은 더 이상 빌딩숲과 경쟁으로 채워진 도시에서 사람들이 살 수없는 세상이 된 탓일지도 모른다.
 
제주를 찾는 이가 늘면서 제주인구는 2013년 8월에 60만명을 넘었다. 물론 제주역사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증가세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8년에 70만명도 무난하게 달성할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일일 수만은 없다. 제주자연과 환경에 기대어 살던 불안한 동거가 더 흔들리고 있다. 벌써 제주시내권은 교통문제와 쓰레기문제·대기오염 등 환경문제로 시달리고 있다. 이미 적정환경용량을 넘어섰으나 대규모 개발 위협은 여전하다. 곶자왈 사이를 뚫고 각종 관광시설이나 주택이 들어서는 것도 보기 어렵지 않다.
 
한 때 잘려나가는 아픔을 딛고 다시 숲을 이룬 곶자왈에게는 또다시 위기시대다. 
 
벌목 등으로 대부분 사라져
 
수만년을 거슬러 올라가 곶자왈은 용암 더미위에 숲이 만들어진 후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적 천이를 거치며 생태계를 유지해왔다.
 
▲ 타래난초.
빙하기가 끝난 1만5000년 이후 기온이 올라가면서 곶자왈지대는 빙하기때 자라던 식물상에서 난대수종이 보태져 지금처럼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생태계 보고를 이룬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탐라국 시절 중국이나 일본까지 교역을 할 만큼 해상활동이 활발했음은 제주에서 선박을 건조할 목재가 충분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탐라에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던 기록을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찾을 수 있다. 한번에 100~300여척을 만들었으니 적지않은 나무가 한라산과 곶자왈에서 베어져나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목축문화가 활발해지고 인구도 늘어나면서 점차 생활권이 넓어진다. 중산간지대에 마을이 들어서고 화전개간 등 농업활동이 증가하면서 한라산을 비롯한 제주도내 숲은 점차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기록을 볼 때 당시 인구가 많아야 10만명 정도였으니 중산간지대에 마을이 그리 크게 형성되지도 않아 목재를 쓴다해도 일부에 한정됐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쉽게 들지 못하는 곶자왈은 숲으로 오래동안 남아있었다. 
 
조선시대까지 곶자왈이 여전히 울창한 숲으로 남아있음은 「제주풍토록」이나 「탐라지」 등 옛 기록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어음리 머들곶(磊藪) 회천동 닥낭곶(楮木藪) 일과리 세미곶(細藪) 신평리 널닥리곶(板橋藪) 등 곶자왈에 대한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다. 한라장촉으로 살펴본 곶자왈도 한라산부터 중산간을 이어 내려 바닷가까지 울창한 숲을 만들고 있다. 1900년대초만해도 중산간이나 오름에 있던 대부분 산림이 농사와 목축 등으로 사라진 상태였으나 곶자왈만큼은 활엽수림지대로 이루며 바닷가까지 뻗어있었다.
 
개발에 상처만 늘어
 
곶자왈이 본격적인 변화를 맞은 것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다. 당시 일제는 제주에 영림서를 설치해 1915년부터 1930년까지 한라산 원시림에서 수백만그루 나무를 벌채했다. 여기에다 민간에서도 숯을 굽거나 목재를 얻기위해 벌채가 늘면서 제주도내 산림은 심각할 수준으로 사라진 것이다.
 
곶자왈도 예외는 아니다. 곶자왈 주변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곶자왈이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큰 나무가 거의없는 관목림지대거나 초지대였으며 목장으로도 활용됐다고 증언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뤄진 산림벌채에 이어 해방과 4·3을 거치며 터전을 잃은 제주도민들이 나무를 베다가 집을 짓거나 농기구를 만들고 땔감을 하면서 곶자왈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60년대 기록사진으로 본 제주도 중산간일대는 나무는 거의 없고 황량한 벌판이 되고 군데군데 밭들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해도 곶자왈에 대한 이용은 나무를 베는 수준이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1차적 이용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1970년대이후 화석연료사용이나 철재나 콘크리트 등 목재를 대체하는 건축자재 사용이 늘면서 곶자왈은 빠른 속도로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곶자왈이 복원되는 것은 암괴상 용암지질특성이 남아있을 때 일이다.
 
▲ 엉겅퀴꽃(사진 왼쪽)과 비지곶과 가는곶 안내판.
동거미오름과 다랑쉬오름 사이에 세화송당온천지구 개발사업을 하다 중단된 곶자왈이 있다. 돛오름과 다랑쉬오름 사이를 가늘게 지나가는 곶자왈이라해서 가는곶(가는곶)이라 부르는 곶자왈지대다. 곶자왈 절반 가량 기반정비로 훼손된 채 사업은 중단되고 10여년동안 방치된 곳이다.
 
사업승인이 취소됨에 따라 제주시가 행정대집행으로 복원사업을 계획하고 있어 어떤 모습으로 복원될 지 관심을 모은다. 사업비만해도 40억원넘게 든다지만 이미 곶자왈특성을 잃어버린 지질구조인지라 곶자왈 모습 그대로 돌아오기는 힘들 것이다. 이곳이 그나마 복원사업이라도 가능한 경우라지만 수백만㎡가 넘는 면적에 들어선 영어교육도시나 신화역사공원, 숱한 골프장은 더 이상 곶자왈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제주에 사람이 오는 일은 곶자왈을 비롯한 제주다운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인해 곶자왈이 사라지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가는곶을 보며 가슴에 새겨본다. ▲특별취재팀=김영헌 정치부 차장, 고경호 사회부 기자 ▲외부전문가=김효철 (사)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