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2.동홍동

'홍로'에서 유래…정방폭포·산지물 등 관광명소 갖춰
지형적으로 포근하고 대형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삶에 애환을 느낄 수 있는 서귀포 향토오일시장을 비롯해 대형마트 등 상권이 집중돼 서귀포시 12개동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돼 있는 등 서귀포시 중심지로 거듭나고 있는 서귀포시 동홍마을의 유래를 살펴보자.
산·바다 자연경관 어우러져
동홍동은 한라산 정상을 뿌리로 방애오름과 솔오름의 맥을 이어받고 설촌의 생활용수인 산지물과 정모시 수원이 천혜의 관광지인 정방폭포를 이루는 등 산과 바다의 자연경관을 고루 갖춘 마을이다.
서귀포 도심으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전체적으로 해발고도 약 50m부터 한라산까지 걸쳐 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진다. 동쪽은 영천동, 서쪽은 서홍동, 남쪽은 중앙동·정방동·송산동으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전형적인 도시와 농촌 복합형의 도시 형태로 상업·농업·축산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서귀포시 최대 인구 밀집 지역으로, 상권의 중심에 있다.
주요 시설로는 서귀포고등학교·남주중·고등학교·동홍초등학교·서귀중앙여자중학교, 그리고 서귀포시 기적의 도서관 등이 있다.
홍로리→홍로면→동홍리로 변천
문헌상 동홍마을의 기록은 고려중엽에서부터 홍로현이 있었던 기록이 있고 1300년(고려 충렬왕 26) 제주에 14현 중 홍로현과 예래현 2개 현촌이 있었던 기록이 있어 홍로촌은 매우 오래전에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홍로'라는 촌락이 번성해 1416년(조선 태종16) 이전의 홍로현은 현재 섶섬·범섬 등이 속해 있었고 효돈동·토평동·동홍동·서홍동·송산동·천지동·서귀동·정방동·대륜동의 일부가 홍로현에 소속돼 있었다.
1416년에 홍로현은 새로 신설되는 정의현에 합속되고 1531년(조선 중종26)에는 정의현 소속하에 있는 직촌이 됐다.
홍로리는 1747년(조선 영조23)에 정의현에서 홍로면으로 분리되었으며 또 서홍로면 동홍로리, 그 후 조선말엽에는 우면으로 개칭이 되고 일제강점기에야 동홍리로 분리해 부르게 됐다.
1700년대 이후에 군위 오씨가 2통 마을을 중심으로 산지물을 생활용수로 이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고, 굴왓(굴전동)지역에는 통물을 생활용수로 삼아 제주 부씨 등이 주축을 이루면서 동홍마을이 형성됐다.
한편 동홍마을의 북서쪽에는 진구밭이라고 부르는 곳에 서귀진과 인근엔 감옥도 있었고, 면사무소와 우편소도 있었다고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4·3으로 마을 역사 단절 아픔
1948년 4·3사건으로 마을을 토벌하기 위한 초토화 작전으로 소개령이 내려질 때 동홍마을도 중산간 마을로 분류돼 160호가 살았던 마을주민들은 해안마을과 이웃마을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피난살이의 삶을 살았다.
이 때문에 1년여 동안 동홍마을이 역사가 단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4·3사건이 진정되고 소개령이 해제되면서 일부 이주민들은 소개지에서 정착을 하였고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와 4·3사건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고 성을 쌓아 마을을 자체 방어하는 한편 삶의 터전을 복구해 살기 시작하면서 현재의 동홍마을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홍마을에는 지역주민들의 휴식과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는 방애오름과 솔오름이 있다.
방애오름은 오름 정상이 분화구가 둥그렇게 파여 있는데, 이를 포함하는 전체 모양이 방아와 같다는 데에서 '방애오름'이라고 불린다.
동남쪽과 바로 북쪽으로는 한라산 돈내코 등반로가 지나간다. 돈내코 등반로가 방애오름 동남쪽을 지나고 바로 북쪽을 거쳐 윗세오름 대피소로 연결돼 있다. 또 방애오름 북쪽 기슭에는 샘이 솟아나 등반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쉼터로도 이용하고 있다.
솔오름은 해발 567m이며 기생화산으로 분화구는 남쪽으로 벌어진 말굽형이다. 해송과 삼나무가 조림되어 있고, 북동사면 일부에 상록수가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지만, 예전에는 풀밭오름이었다고 전해진다.
또 산세가 사람의 피부(살)처럼 매끄럽다 하여 솔오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미악산(米岳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생김새가 쌀을 쌓아놓은 것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설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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