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5. 일도동

건입동 일본군갱도진지 등 일제 흔적 고스란히 남아
일도1동은 제주목관아-산지천-사라봉-탑동을 연계한 '문화·관광벨트의 중심지'이자 제주의 로데오 거리인 '칠성로'가 자리한 패션의 1번지다. 일도2동은 대단위 택지 개발로 단독주택과 아파트 단지들이 조성된 제주시의 대표적인 거주생활권이다. 건입동은 제주 영주십경 중 '사봉낙조'와 '산포조어'를 품고 있으며 제주항이 위치한 물류 중심지다. 탐라국 시대부터 제주도의 중심마을이었던 일도1·2동과 김만덕의 얼이 담겨있는 건입동의 지명 유래를 들여다보자.
제주군 중면의 중심마을
일도동(一徒洞)의 옛 이름은 '일내'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일도(一徒) 혹은 일내라 불렸던 일도동은 조선시대에는 제주군 중면의 중심마을 중 하나였다.
이후 1955년에 일도1동과 일도2동으로 나뉘었다가 1962년 다시 일도동으로 병합, 1979년 재차 분동된 뒤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샛물골'은 일도1동의 중심 동네다. 마을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작은 도랑이 있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식 표현으로 '간수동(間水洞)'이라 표기되기도 했다.
일도1동의 서쪽 동네 이름은 '막은골'이다. 동네 북쪽에 바다가 위치해 있지만 통하는 길이 없어 '막은골'이라 불렸다.
이외에도 고·양·부 삼성이 일내·이내(이도동)·삼내(삼도동)를 나눌 때 사용한 축대인 '칠성대'가 있었던 '칠성골' 등이 있다.
일도2동은 크게 '신산동' '인화동' '신천동'으로 나뉜다.
신산동의 '신산모(아래아)르'는 지금의 신산공원 북쪽 일대 마을로 지형이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체'라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현재는 한자식 표현인 '신산동(新山洞)'이라 불린다.
또한 지금의 '두문동(杜門洞)'인 '두문이머세'도 신산동의 마을 중 하나다. '머세'와 '머들'은 각각 '좁은 들녘'과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잡초가 무성해 머세에 농가의 소를 풀어 놓았으며 농경지의 피해를 막기 위해 가축의 출입문을 머들로 막아놨다고 해서 '두문(杜門)'이라 불렸다.
인화동에는 '복지물동산' '흰머들' 등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암석이 하얀 이끼로 덮였다는 뜻의 '흰머들' 마을이 지금의 인화동이다. 현재는 '흰 머들 동산'을 소공원으로 조성, 이곳에 '인화정'이라고 현액을 새겨 놓은 팔각정자가 세워져있다.
'복지물동산'은 현재의 인제 사거리 서북쪽 능선으로 '꿩이 엎드려 물을 먹는 형체'라 해서 '복치(伏雉)동산'이라고도 했으며, 고려 시대에 절이 있었던 '절터왓'이라고도 전해진다.
이후 1970년대에 이 동네를 '복천동(福泉洞)'이라 명명 후 돌비석을 세웠는데 현재는 통칭을 '인제동(仁濟洞)'이라고 한다.
신천동의 옛 이름은 '새나끗'이다. 현재의 신천지 1차 아파트 남쪽 일대 지역으로 냇가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데서 '새(新)나(川)끗'이라 불렸다.
60여년 전 별도천으로 내리는 냇물이 이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해서 '새냇곳(아래아)' 또는 '새냇긋'으로 불리다가 '신천동'이 됐다고도 전해진다.

건입동(健入洞)의 옛 이름은 '건들개' '건들개마(아래아)을'이며 건들개 인근에 '산지물'이 있어 '산지물마(아래아)을' 또는 '산지마(아래아)을'이라고도 불렸다.
'건들개'의 한자식 표현으로 '건입촌(巾入村)' 또는 '건입포리(健入浦里)', '건입리(巾入·健入里)'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건입동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사라봉 정상 북쪽에 있는 '일본군갱도진지'다.
근대문화유산 306호로 지정된 일본군갱도진지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이 만든 군사시설이다.
당시 일본은 제주시에만 1만1천여명의 병력을 주둔시켜 군사시설을 구축했다.
제주동·서비행장과 제주항은 일본군에게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으며 사라봉에도 대규모 갱도를 구축해 유사시를 대비했다.
특히 일본군이 도내 해안과 오름에 설치한 진지 중 사라봉 갱도진지는 접근하는 적의 전개방향을 틀리게 하거나 중요 거점을 적에게 뺏기지 않게 하기 위한 '전진거점기지'로 역할 했다.
사라봉 일본군갱도진지 공사에는 당시 제주시 구좌·성산 지역 주민들까지 총동원됐다. 모두 8곳으로 이뤄진 사라봉 갱도진지의 전체 길이가 500여m에 이르는 만큼 동원된 주민들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실제 갱도 내부 벽면에는 사람의 힘으로 굴착했음을 엿볼 수 있는 곡괭이 자국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제주동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주정공장 사택' 역시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무수주정제주공장이 완공될 즈음인 1943년에 지어진 주정공장 사택은 당시 공장 임원들이 머물던 집이다.
당시 이 일대에 비슷한 구조의 사택들이 많이 지어져 이 동네를 '사택동네'라고 불렸다고 한다.
현재는 딱 한 채만 일본가옥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8살때 주정공장에 다니는 아버지와 함께 이 집에 살기 시작했다는 할머니는 지금도 70년 넘게 이곳에서 살고 있다.

전 재산 풀어 1000여명 구해
김만덕은 1739년(조선 영조 15) 지금의 구좌읍 동복리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에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김만덕은 외삼촌에게 맡겨지자마자 '월중선'에 보내졌다.
김만덕은 23세에 자신이 기생 명단에 올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제주목사 신광익과 판관 한유추를 찾아가 다시 양녀로 환원시켜 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이후 다시 집안을 일으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겠다는 약속을 하고 기녀 명단에서 제명 받은 김만덕은 건입포에 객주집을 차려 재산을 불리는데 전념했다.
1794년 제주에 잇따른 태풍과 흉년까지 겹치면서 10만여명이던 제주 인구가 3만여명으로 줄어들 만큼 '대기근'이 일어났다.
이때 김만덕이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인 후 굶주림에 허덕이던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등 천여명의 목숨을 살렸다.
이러한 김만덕의 '나눔 정신'은 현재에도 계승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매년 김만덕의 높은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만덕봉사상'을 선정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김만덕 정신을 기리기 위한 '김만덕기념회'도 발족됐다.
한편 김만덕의 묘비는 현재 제주시 건입동 모충사 내 '김만덕 기념관' 옆에 세워져있다. 고경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