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6. 표선면

▲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시리 유채꽃 길.
표선리 '당캐' 조선시대부터 포구 형성…관광객 즐겨 찾는 횟집 군락도
정부 지정 '성읍민속마을' 민속학적 가치와 관광지로 특별한 성격 지녀
 
제주도의 동남부, 서귀포시 동부지역에 위치한 옛 정의현의 500여년간 도읍지였던 성읍민속마을, 제주에서 가장 넓은 표선백사장,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시리 유채꽃 길 등 전통문화와 관광 그리고 1차 산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표선면을 살펴보자.
 
표선면 중심지 해안마을 표선리
 
표선리는 매오름(웅악) 동쪽, 달산봉 남쪽 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해안마을이다. 
 
지금까지 표선리에 대한 최초의 설촌은 약 600년전 고려 말 충렬왕 무렵에 지금의 '웃말개미(웃말캐미)'에 사람이 들어와 살고, 마을 이름을 촉지리라 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표선리는 동상동, 중하동, 서상동, 서하동, 당포, 한지동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당캐'라는 당이 있는데서 유래하였으며, 조선시대부터의 포구이다. 국권침탈 이후 일본의 전복 채취선의 근거지가 되고 일본을 왕래하는 여객선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1일 30∼50척 어선이 드나드는 좋은 포구이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횟집 군락마저 형성됐다.
 
뱀이 움직이는 모습 하천리
 
하천리는 표선리 북동쪽 해안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해안마을로, 동쪽의 천미천을 사이에 두고 성산읍 신천리와 접하고 있다.
 
설촌에 대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어느 날 노승이 덕거리를 지나다가 지형을 보니 입사형국(뱀이 서있는 모습)이라 굶주려서 못 살 형국이니 이보다 조금 밑으로 이촌하면 양식 걱정 없이 배불리 먹겠다고 해 조금 남쪽인 묵은 가름으로 이촌 했다.
 
그러나 식량은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사건 사고가 많아 그 후 이촌한 곳이 지금의 하천리라 한다. 지금의 하천리는 주사형국(뱀이 움직이는 모습)이라 전해진다.
 
또는 할망밭에 살다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 북쪽으로 이촌 한 곳이 지금 묵은 가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정의현 도읍지 성읍리
 
성읍리는 정의현성이 있었던 중심마을로, 영주산 남쪽, 남산봉 서쪽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을 이른다. 
 
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1리를 국가지정 민속마을로 지정한 것은 약 500년 동안(1423∼1914)의 도읍지이면서 오밀조밀한 유형문화재와 무형문화재가 이 마을 안에 밀집되었기 때문이다.
 
해안에서 8㎞ 올라간 아늑한 산촌인 성읍민속마을은 정부지정 민속마을로서 민속학적인 색다른 가치와 관광대상지로서 유별난 성격을 지닌다.
 
1980년 5월 6일 지방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 보호되다가 1984년 6월 7일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됐다. 
 
성읍1리는 오늘날은 서상동, 서하동, 동상동, 동하동 등 4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성읍2리는 1950년대 이후에 옛 '구렁팟' 일대를 성읍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읍2리는 '구룡동'과 '안보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가시리에 있는 따라비 오름
오름과 함께하는 가시리·세화리·토산리
 
가시리는 가시오름 북쪽, 설오름 남쪽, 갑선이오름 서쪽에 형성돼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가시리의 옛 이름은 '가시오름을'이다. '가시오름' 북쪽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가시리 일대에서 확인되는 첫 마을은 17세기 말 '탐라도'에 보이는 '상악촌'과 '안좌촌'이다. 상악촌은 18세기 후반에 가시악리로 표기되고, 19세기부터 가시리로 표기됐다. 19세기 말에는 가시리가 둘로 나뉘었다가 1905년 이후에 통합해 가시리라 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중동, 안좌동, 두리동, 폭남동, 동상동, 역지동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세화리는 매오름 서남쪽 일대, 토산악(토산봉) 동쪽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세화리는 세화1리는 서상동, 동상동, 동하동 등 3개의 자연마을로 세화2리는 본동과 중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세화3리는 강화동 1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토산리는 토산봉 서쪽, 가시오름 서쪽 일대에 형성돼 있는 중산간 마을로, 표선면의 가장 서쪽 마을이다. 고려시대 속현의 하나였고, 조선 후기 때는 토산면이라고도 했다. 
 
토산은 원래 토산리 가까이에 있는 오름 이름인데, 이 오름 가까이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데서 토산촌 또는 토산리라 했다. 
 
토산1리의 옛 이름은 '북토산' 또는 '웃토산', 또는 '절려가름'이다. '본동과 월지동 등 2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토산2리는 토산악 남쪽 바닷가, 신흥리 동쪽 바닷가 일대에 형성되어 있는 해안 마을이다. 토산2리의 옛 이름은 '남토산' 또는 '알토산'이다. 1940년대 말부터 '토산개' 주변의 '알토산'과 '넙은개', '당머리' 일대를 행정상 토산2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토산2리는 본동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김지석 기자

이웃사촌 '빌레 바다 싸움' 종지부

천미천 평화교

천미천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하천리와 신천리는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천을 건너면 만나는 이웃사촌이다. 하지만 바다 해산물 채취를 놓고 양 마을 주민 간 갈등이 이어졌다.

천미천에는 넓은 빌레가 있는데 이 곳에서 하천리 해녀가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해 왔다.

그러던 중 1961년 일주도로가 천미천을 가로질러 통과함으로 인해 다리공사를 하고 이름을 '하천교'라고 하자 신천리에서 반발하며 큰 싸움으로 번졌다.

이에 군사정권에서 조종위원회를 열고 걸어 다니며 채취가 가능한 둔북, 톳 등은 신천리에서 채취하고 바다에 들어가서 채취하는 것은 하천리에서 채취하기로 합의를 보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다리 이름은 당시 도의원인 제주시 화북동 출신 청탄 김광추 선생이 '평화교'란 명칭이 어떨까하는 의견을 내놓자 양 마을이 이를 수용해 '평화교'가 됐다고 전해진다. 김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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