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 | ||
| ▲ 피터 위어 감독이 연출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89). 1950년대 보수적인 남자사립학교 웰튼을 배경으로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로 인해 자유를 말살당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
신격화된 우상에 복종 강요하는 사회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상증후군 진단
한스의 죽음은 명확한 '사회적 타살'
수능이 바싹 앞으로 다가왔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과 그 가족들은 아마 지금쯤은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 거리를 가다보니 "수능, 찹쌀떡 먹고 떡하니 붙자."라는 광고가 눈에 띈다. 떡하니 붙으면 좋겠지만 떡하니 못붙으면 어떻게 하지? 내가 수능생은 아닌데, 걱정이 된다. 참, 쓸쓸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입시지옥이라는 말은 해방 이래 한 번도 우리 현실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미래를 결정한다는 무시무시한 이데올로기 공세에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11월은 가을의 절정기이다. 추수의 절정기라는 말이다. '추수'의 뜻은 곡식의 열매를 거둬들인다는 뜻인데, 수능의 결과에 따라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이들이 많이 생길까봐 걱정이다. 희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이월된 꿈들을 불러모아 에너지를 다시 모은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럴 때 생각나는 작품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의 주눅든 어깨와 두통에 떨고 있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 처음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헤매는 스스로를 위로한 적이 있다. 작품 속의 주인공이 마치 나인 것 같아 움찔움찔 놀랐던 기억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스 기벤라트는 마을에서 유일하게 수재 소리를 듣는 소년이었다. 수재 소년답게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숙 신학교에 입학하지만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하일너는 시인 소년이었는데 신학교에서는 천재적 망나니로 통한다. 신학교의 규율을 밥먹듯이 무시하고 숲속으로 무단 산책을 나간다거나 숲 속 연못가에 드러누워 시를 쓰거나 읊는 행위로 시간을 죽이며 지낸다. 너무나 다른 두 소년은 알 수 없는 끌림으로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되는데, 하일너의 무단가출로 인해 우정은 끝나고 만다.
갑작스런 공백이 주는 허허로움을 한스는 견딜 수 없게 되고 시름시름 앓다가 요양을 허락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학교를 포기하는 것이었으며 다시 돌아온 고향마을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본격적으로 탐색하게 된다. 결국 기계공이 되려고 견습을 하게 되고, 휴일에 시내로 술 마시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숲 속 연못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자아를 찾는 일은 제쳐두고서라도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기도 전에 그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고 만 것이다. 슬픈 이야기다.
자연이 만든 본래의 인간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불투명하고 불온하다. 그것은 미지의 산으로부터 흘러 떨어지는 거친 물결이며 길도 질서도 없는 원시림이다. 원시림을 자르고 정리하고 힘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학교도 태어난 그대로의 인간을 붕괴시키고 굴복케하여 힘으로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학교의 사명은 당국이 인정하는 원칙에 따라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을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들고, 마침내는 병영의 주도 면밀한 훈련으로 최후의 완성을 보게 될, 여러 가지 성질을 깨우치게 하는 일이다.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이미선 역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더니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어찌보면 허무하다고 여겨질 만한 작품이다. 한스의 죽음도 그렇고, 작품이 주는 메시지도 그렇다. 그럼, 어떻게 살란 말인가라는 물음에 봉착하면서 한동안 멍하니 길을 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물음으로부터 삶을 다시 시작해보라고 저자는 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서, 주인공 한스를 그토록 허무한 죽음으로 이끈 원인이 무엇일까? 신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억압기제가 그를 신경쇠약으로 만들어서 그럴까, 마을에 사는 '에마'라는 소녀와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그를 충격으로 밀어넣었을까, 급작스레 떠나고만 하일너의 실종이 그의 의지할 바를 없애버려서 그럴까, 자신의 수제자로 받아들이려고 하던 교장이 한스의 변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대를 포기하고 말아서일까. 어쩌면 그 모두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에게서 생에 대한 애착을 갖지 못하게 한 건 애정없는 기대감으로 꽉 찬 억압의 사슬이었다. 누구나 다 타고난 바가 다르다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권위있는 자들의 경멸에 찬 눈빛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어머니는 어려서 돌아가셨고, 간신히 마음을 얻고 세상을 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준 시인 친구는 생사를 알 수 없고, 첨탑 아래 사각의 교실에서 히브리어와 수학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고…… 총체적인 질풍노도의 소용돌이는 그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어 버렸던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기계공으로서의 삶도 그에게 즐거움을 주지는 못했다.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스스로를 탐색하고, 실패와 실수를 경험하고, 그 모두를 기다려주는 시간. 하지만 한스의 가족들과 선생님과 목사님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기다려주지 않는 이들의 시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길은 멀지라도 천천히 오래 걷도록
아무리 겨울이 혹독하다 하더라도
꿈꾸는 자들의 마음 늘 따뜻했으면
시대가 변했으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도식이 있다면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원래의 나를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사치스런 놀음이며, 우정 또한 성공에 저해가 된다면 끊어야 하며 오로지 믿을 바는 신격화된 우상에의 복종과 권위자의 기대를 저버리면 배은망덕이다. 여기서 우상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데, 대체로 권력이거나 돈, 지위나 명예, 유명세나 몸의 우월성과 같은 표면적 허상들이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고, 그에 따른 불이익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 사회는 그런 자를 신경 쇠약이거나 의지 박약, 정신 착란 등의 이상증후군 환자로 진단하고 판명하여 제 집으로 보내버린다는 사실이다. 한스의 죽음은 우연을 가장한 명확한 사회적 타살이다.
"아주 지쳐버리지 않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게 될 테니까."
이 무시무시한 말을 나는 다르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아무리 길이 멀지라도 천천히 오래 걷도록 하자. 겨울이 혹독하다 하더라도 꿈을 꾸는 자들의 마음은 늘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인간이 타고난 바가 다 다르듯이 꿈도 사랑도, 삶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돈이나 지식, 외모만으로 한 인간을 단정짓지 말고,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으며,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 사회가 지지하고 성원한다면 혹독하게 자신을 내던져버리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꿈을 꾸는 자는 아름답다는 말이 한낱 구호가 되지 않고, 진실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가을의 나뭇잎들은 다시 올 시간을 위해 스스로 잎사귀를 떨군다고 한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기나긴 겨울을 살아낼 양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니 청소년들이여, 아직 삶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먼먼길을 위해 잠시 움츠려 시간을 기다려 보기로 하자. 그 안에서 내 안의 숨은 능력이 우쑥우쑥 자라나서 싹을 틔울지도 모르는 일이니. 부디 힘내기를. 제주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
■ 헤르만 헤세
![]() | ||
14세 때인 1891년 그는 명문 개신교 신학교이자 수도원인 마울브론 기숙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1892년 신학교를 도망쳐 나왔다. 부적응과 신경쇠약증 발병, '시인이 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되지 않겠다'는 것이 중퇴이유였다. 신학교를 도망쳐 나온 후 짝사랑으로 인한 자살 기도, 정신요양원 생활, 11월에 칸슈타트 김나지움 입학, 신학교 때의 경험은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 비판적으로 묘사되었다.
학업 중단 후, 반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튀빙겐에서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삶의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1904년 「페터 카멘친트(향수)」를 통해 헤세는 독일어권에서 유명한 작가가 되며, 이후 그는 성공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싯다르타」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