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17. 연동·노형동

제주특별자치도청·도의회 등의 관공서와 교육·금융기관들, 그리고 대규모 상가·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선 연동·노형동 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도시화를 거듭하고 있다. 도시 개발속에서 읍·면의 마을처럼 제주의 자연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큰 도시라도 설촌 당시의 어린 시절이 있는 것처럼 연동·노형동에도 마을유래와 관련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꼭꼭 숨어있다.
행정타운·대규모 상가·아파트 단지 개발 도시화 거듭
연동…연꽃 모양의 땅에 묘를 쓰면 자손 번성한 '연골'
월산·해안마을 등 다양한 지명·설촌 이야기 숨어있어
설촌 역사가 380년으로 추정되는 연동은 '연골' '잇골'로 불렸다. '탐라도' '제주삼읍도총지도' '탐라순력도-한라장촉' 등에는 한자로 '연동촌' '연동리'로 표기됐고 '연골' '잇골'로 부르던 마을은 한자 표기에 따라 '연동'으로 굳어졌다.
'연골' '잇골'의 지명은 연동의 풍수지리설과 최초 마을민들의 종교적 관습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른 지명유래는 연동의 남조봉 북서쪽에 위치한 연화도수형(연꽃이 꺾이어 물에 닿다)의 지형에서 비롯됐다.
연꽃 모양의 땅에 묘를 쓰고 연꽃의 잎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집을 지으면 자손이 잘 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연동의 선주민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름을 '연골'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종교적 관습에 따른 지명유래는 연동의 선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던 신당에서 전해진다. 제주 어느 지역에서나 본향당의 신이 절대적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연동의 선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며 의지하는 당신도 그와 같았고 임금이 다스리는 마을과 같다고 여겨 '잇골' 또는 '잉골'로 불려졌다.

일부에서 '노형(老衡)'이라는 지명이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젓는 형태와 같다는 것에서 유래됐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문헌과 비석 등에서는 이미 지명을 노형(老兄)으로 쓰고 있다.
노형은 원노형을 비롯해 월랑·정존·광평·월산·해안 등으로 이뤄졌고 제주의 여느 마을처럼 특수한 지형에서 지명이 유래된 마을들이 대부분이다.
월랑은 민간에서 '다랑굿' '다랑곳'으로 불렸는데 앞곶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반월, 서쪽은 서반월로 불렸다. 양쪽의 반월을 합치면 달이 밝다고 해 '월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정준·정존' 일대는 지세가 높고 바른 모양의 동산에서, 광평은 '넙은드르' 즉 '넓은 들', 월산은 반달 모양의 지형에서 유래됐다.
해안동은 한라산과 어승생의 화산활동에 의해 평탄한 지형을 갖추고 있다. 500여년전부터 진주 이씨가 마을 북쪽에 위치한 '주루레' 일대에 살면서 설촌됐고 김해 김씨와 송씨가 이 지역의 예음물과 이승물 지역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해안동의 지형은 바다의 게의 눈을 연상시켜 지명이 해안(蟹眼)으로 불렸다가 후에 해안(海安)으로 바뀌었다.
바다가 잘 보이고 평온한 느낌을 주기 때문도 있지만 사람이 가면 모두 숨어버리는 게의 특성과 이로 인해 인재가 안 난다는 이유에서다. 김영모 기자

눈부신 발전 이면에 아픈 상처도 간직
■ 4·3 잃어버린 마을들
신제주를 이루는 마을로 인구·관광·서비스 산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연동과 노형동이지만 4·3의 광풍을 피해갈 순 없었다.
연동에서는 1948년 10월8일 제주도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불순분자로 오인된 7명이 도령모루동산(현재 신제주 진입로)에서 총살당했다.
소개령이 내려진 뒤 주민들은 도호동(연동 노련로에 형성된 마을)의 성담에서 수용소 아닌 수용소 생활로 고초가 컸고 무장대의 성안 침투에 대응하면서 인명·재산 피해도 잇따랐다.
4·3이 막이 내리게 될 즈음 연동은 사망자가 106명, 중상 1명, 187호의 가옥이 방화로 소실됐다.
노형동의 피해도 극심했다. 현재 남아있는 노형동의 마을외 드르구릉·물욱이·개아진이·방일이, 함박이굴 등의 작은 마을이 이 시기에 사라졌다. 희생자는 원노형 40명·월랑 130명·정존 120명·광평 90명·월산 70명 등 450명에 이르렀다.
노형동에서도 무장대에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정존성담, 광평성담, 월산성담이 축조됐다. 하지만 4·3이후 주민들이 집 축담, 밭담 등으로 이용해 지금은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는 잃어버린 마을인 드르구릉터와 주민들이 학살당했던 배염나리 계곡이 4·3의 비극을 전하고 있다. 김영모 기자
김영모 기자
kimgu193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