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초 재건복 입던 시절의 관광안내원들. 모 방송국의 출연요청을 받고 방송국을 방문했을 때 기념촬영 한 것. 앞줄 맨 오른쪽이 김경희씨. 뒷줄 오른쪽이 당시 제주관광협회 사장이던 고 백형석씨.
60년 초, 제주 1호 관광안내원 김경희씨(64)가 서울에 있을 때였다. 라디오에선“노오란 샤쓰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가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미니스커트, 장발 단속하느라 경찰들의 잣대와 가위소리가 골목을 누비던 시절. 당시 서울사람들에겐 제주는 몽고나 시베리아와 같이 매우 변방이었다. 어떤 이들은 “제주말은 일본어 같기도 하고 영 알아듣지 못하겠군”, “그 곳에서 바람나 도망쳐 왔나”에서 심지어 “어∼제주도 사람도 우리와 똑같이 생겼네”라고 얘기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때 김씨는 결심했다. “정말 이 사람들이 제주의 자연의 모습을 모른다? 어디 봅시다. 꼭 제주의 아름다움을 당신들이 알 때가 오리오” 경리학원에서 타자를, 학원에서 영어, 일어회화를 배웠다. 4·19가 터져 거리의 피 흘리는 데모행렬 틈에서 그녀는 풍운의 꿈을 싣고 제주로 내려왔다.

김씨의 ‘제주관광사업협회’입사 초년시절은 비로도 치마에 하얀 저고리차림이었다. 제주행 비행기가 1주일에 3차례 있을까 말까하는 시절이었으니….

당시 사장이었던 고 백형석사장이 “미스 김, 옷도 구색을 맞춰야지, 이젠 관광안내원이야, 제주를 알려야 할 사람의 복장이 그게 뭔가, 양장 입으라구” 여성 양장점이 전혀 없던 터라 남성 양복점에서 옷을 해 입던 김씨에게 5·16군사 쿠데타가 발발한 것은 1년 후였다. 그때 해 입은 것이 바로 재건복(사진). 군사 정권 시절이라 모든 공무원에겐 통일 복장인 재건복 착용이 의무시 될 때였다. 김씨 이후에 2명이 더 입사해 관광안내를 했다. 당시엔 짚차가 관광버스 노릇을 했는데 고장이 자주 발생해서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제주관광의 화려한 시절은 바로 그런 60년 대였지 않았나 싶다. 관광객들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제주의 비경 앞에서 탄성을 지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으니”

흑인관광객들을 안내할 때엔 마을을 지날 때마다 “와∼저 피부색 좀 봐. 너무 신기하게 생겼다”면서 따라오는 더벅머리 개구쟁이들을 슛아보내랴 관광객 구경시켜주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40여년간 제주관광업에 종사해 오고 있는 관광업계의 산증인으로서 그녀의 바람은 없는가. 그것은 난립하고 있는 여행사들의 질서잡기다. “공황, 부두에 종합관광안내센터 설립이 시급해요. 관광객이 취향에 맞게 숙박시설, 음식점, 휴양지 선택을 한 창구로 통일해야 합니다” 김씨는 제 살 깎아 먹기 식인 관광업계의 행태가 사라지길 간절히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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