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제주잠녀'6부-제주해녀문화목록20. 문학 작품 속 잠녀3

 

▲ 제주해녀들이 바깥물질을 나서게된계기는 19~20세기의 제주경제와 연관이 있다. 잠녀를 다룬 소설들에서도 당시의 시대상황과 지역 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사실적 묘사로 학자들의 연구 자료 뒷받침
시대 상황·지역 여건 등 복합적 해석 가능
직접 당사자 또는 관찰자로 '서사성' 완성

 
제주잠녀들이 바깥물질을 행하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해석된다. 그중 하나가 '보다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의 연안 어장에 해산물의 절대 부족'이라는 관점이다. 이는 먼저 제주 잠녀를 연구했던 학자(강대원 [해녀연구](1970)·[제주잠수권익투쟁사](2001), 김영돈 [한국의 해녀](1999))들로부터 제기됐던 내용이기도 하다. 실제 바깥물질을 행하기 시작한 19 세기말부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던 20세기 초반을 전후한 시기의 제주경제를 대변하는 상황과도 부합된다. 잠녀를 다룬 소설들에서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지역 여건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출가 물질의 이유 밝혀
 
현기영 소설가는 '거룩한 생애'에서 일본의 가혹했던 식민지 정책을 꼽았다. 
 
"물자 공출에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사람 공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열아홉, 스무살짜리는 군대에 잡아가고 그 위로는 탄광 인부, 전쟁 노무자로 끌어가기 시작했다. 친정동생은 연락선 선원이라 상관없었지만 남편이 걱정이었다. 남편은 스물 네 살로 징용대상이었다.…이 때 간난이가 꾀를 내어 육지로 물질 갈 잠녀들을 모집해 남편을 그 인솔자로 삼았다. 남편은 왜말을 할 줄 알아서 인솔자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잠녀 아홉명을 모집한 간난이 부부는 돌 지난 아기를 시어머니한테 맡기고 연락선으로 섬을 떠났다"(현기영의 '거룩한 생애'중)
 
제1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검은 모래」에서 구소은 소설가는 "일제강점기 전부터 일본 어민들은 심심찮게 제주 앞바다에 출몰하여 어업 침탈을 일삼아 제주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하였다. 나라를 송두리째 삼킨 뒤로는 제집 드나들 듯 하여 바다에서 채취하는 귀한 해산물들의 씨를 말렸다. 전복이며 소라의 씨가 말라버린 바다에서 건져낼 것이 없어진 여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뭍으로 나갔다. 물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았던 잠녀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제주의 잠녀들은 타 지역으로 출가물질을 나갔지만 고된 노동의 대가는 보잘 것 없었다. 출가물질을 위한 준비자금을 마련한다 해도 높은 이자율로 인하여 빌리고 갚아나가는 악순환은 반복될 뿐이고, 일본인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거나 다름없는 해녀조합에서 출가증을 사야만 출가물질이 가능했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앞바다에서 물질하기 위해서는 조합비를 내야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 조합비 내는 것도 아까운 판에 가족들 떠나 멀리 뭍으로 고생길 나서면서 3원이나 하는 출가증을 사야만 한다니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고 기술했다.
 
그렇게 시작된 바깥물질은 1922년 제주-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의 등장과 더불어 목적지를 일본까지 확대해 간다.
▲ 1960년대 제주잠녀들.
 
해녀항일운동부터 4·3까지
 
현기영의 '바람타는 섬'은 4·3 항쟁의 처절한 전사(前史)며 당시 최대의 민중항일투쟁이었던 1932년 해녀항일투쟁을 다루며 제주 역사의 대서사시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에 비해 '거룩한 생애'의 시점은 역사적 현장과 다소 거리를 뒀다. 그렇다고 어색하거나 내용이 왜곡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람타는 섬'에서 여옥이 모든 사건의 핵심이었다면 '거룩한 생애'의 간난이는 서 너 걸음 떨어져 비극적인 흐름을 탔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한 가운데 이듬해 읍내에서 삼일운동 기념대회가 열려 태극기와 마을기를 앞세우고 모여든 이만 군중이 이런 세상 못살겠다고 '완전 독립'을 외쳤다. 
 
일제 대신 다른 외국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한 진정한 해방은 아니며 이제부터 진짜 해방을 준비해야 한다고, 사기그릇 깨지면 여러 조각 나지만 삼팔선이 깨지면 한덩이가 된다고 온 읍내가 깨지면 여러 조각나지만 삼팔선이 깨지면 한 덩어리가 된다고 온 읍내가 떠나가라고 기염을 통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무자비한 총격이었다. 미군정 경찰의 총격으로 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섬 백성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온 섬이 총 파업에 돌입했다. 시장이 철시되고, 학교·회사는 물론 관공서까지 문을 닫았다. 육지부에서 응원경찰대, 서북청년단이 대거 미함정을 타고 들이닥쳤다.…'앉아서 죽느니, 서서 살자'는 말이 온 섬에 유행하면서 마을 자우대로 따라 생겨났다.…드디어 군대가 출동하고 사태는 곧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제 섬 젊은이들은 진압이 아니라 토벌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그러나 염라대왕의 명부에 이미 그녀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기상천외하게도 그것은 왜정 때 만들어진 경찰 기록이었다. 칠팔년 전 왜놈 조합서기들과 맞서 싸우다가 이십일 구류 산 것이 기록에 올라 남편과 한통속의 사상불온자로 점 찍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죄였다. 일제에 의해 불온분자라고 낙인 찍힌 자는 해방된 땅에서도 여전히 불온분자였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현기영 '거룩한 생애' 중)

 

이양지 [해녀]

잠녀는 제주의 근·현대사만이 아니라 '재일조선인'라는 시대적 유민의 삶을 대변하는 존재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재일제주인 2세인 소설가 이양지(1955~1992)의 [해녀](1983)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현 작은 마을에 정착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조센진'이라는 사실이 큰 흉처럼 느꼈던 경험과 귀화 후 경계인으로의 삶 등을 글로 녹여냈다. 재일한국인의 경계적 위치, 혹은 이중적 타자의 위치를 문학작품을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묘파하고 있는 작가로 평가받던 그는 민족 정체성 논리를 넘어 경계에 직면한 자아의 복합적 내면을 폭로하는 예리한 관찰자 이자 경험자로서의 시선을 보여줬다. [해녀] 는 그 결말의 비극성으로 인해 재일한국인의 '불우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에 나타난 주인공의 병적인 심리 상태와 표출 행위들은 역사적 추체험에 기인한 희생양 의식의 강제된 내면화에서 비롯됐다고 해석된다. 특히 재일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억압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러한 주인공의 고통과 좌절의 경험은 '물속'으로의 회귀를 통해 비로소 멈추게 된다.

고향 제주 바다로 형상화된 '물속'은 재생과 정화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기원을 드러내는 공간을 의미한다. 특히 '죽음'이라는 절박한 행위를 통해, 그녀가 재일한국인,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감을 극복하고 정체성 모색의 순간으로 나아가는 한 지점을 완성한다.

첫 작품인 '나비타령'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면서 일본 문단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매년 두 편 정도 작품을 발표했고, 1989년 2년에 걸쳐 쓴 자전적 소설 '유희(由熙)'라는 작품으로 마침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다.

재일동포로 이 상을 받은 이는 1951년 이회성에 이어 두 번째다. 이후 1997년 유미리, 2000년 현월이 그 맥을 이었다. [해녀]는 그가 요절한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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