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마을의 유래를 찾아서] 20. 영천동

▲ 맑고 깨끗한 물을 자랑하는 돈내코는 영천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송산동으로 편입된 구역 제외한 옛 토평·상효리 통합
서귀포 유일의 공업단지 고용창출·지역경제 중심역할

영천동은 북쪽으로는 백록담, 아래쪽으로는 검은여까지 산과 바다를 모두 품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서 맛있는 감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맑고 깨끗한 '돈내코'와 푸른 숲이 어우러진 관광지이기도 하다. 또 서귀포시 유일의 공업단지가 들어선 지역경제의 중심지로 지역주민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의 중심적 역할로 발돋움하고 있다.

영천동은 송산동 구역으로 편입된 구역을 제외한 토평동 지역(옛 토평리)과 상효동(옛 상효리)를 통합한 동이다. 
 
멧돼지를 풀어 키우던 토평마을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토평마을은 처음에는 현재 서귀포 칼호텔 북쪽 속칭 '무근가름(광숙이왓, 왜왓)' 등에 정착해 살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주했다. '광숙이왓'과 '왜왓' 등지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생활터전을 바다에다 두고 살던 사람들은 해변 가까이에 살다가 점차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농토가 넓은 곳을 찾아서 위쪽으로 이주했고, 산 쪽에서 생활하던 화전민들도 마찬가지로 농사짓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산 밑으로 내려와 자연스럽게 마을을 형성하며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토평마을은 예전 '돗드르'라고 불렸었다. 한라산에 멧돼지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마을 근처에는 멧돼지가 좋아하는 도토리(초낭열매)가 많아 멧돼지가 많이 서식했다. '돗'은 돼지의 15세기 고어이고 '드르'는 제주방언으로 들판이다. '돗드르'란 말을 직역하면 돼지 떼를 넓은 들판에서 소나 말처럼 방사하는 지역이란 뜻으로 예전에는 돼지도 소나 말처럼 놓아먹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지금 토평이란 이름도 돈(豚)이 '土'로 변했고 '드르'는 들 평, 벌판 평인 '坪'으로 됐다.

처음에는 토평(土坪)이였다가 18세기 후반에는 '吐坪'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한란 전시관
4·3사건 흩어졌다 다시 모인 상효마을

상효마을 한라산 제1횡단도로를 따라 서귀포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내리막길에 이르면 길 동편에 영천악(靈泉岳)과 칡오름이 앉아 있다. 상효동은 이 오름들을 끼고 고지에서부터 3리, 2리, 1리의 순으로 내려온다.
 
서귀포시가 중심에서 동북쪽 4.5㎞, 토평리의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 상효1리, 칡오름 남쪽에 않아 있는 마을이 2리이며 영천악 서쪽 제1횡단도로를 끼고 있는 마을이 법호촌이라고도 부르는 상효3리이다. 상효1리의 설촌은 지금부터 약 400여년 전 조(趙), 정(鄭),허(許) 세 성씨가 정착하면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서북쪽에 '조개물'이라는 샘이 있으며 속칭 '알동네'에는 정씨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정우영', 또 이 동네에 허씨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허질생이드르'와 '허선달밭' 등의 지명과 지경이 있다. 당시 이 마을의 이름은 토평마을과 마찬가지로 '돗드르'였다. 그 후 1902년 탐라가 명칭을 제주로 고치고, 제주, 정의, 대정 등 삼군제를 실시할 때 상효·하효·신효리는 정의군에 속해 있으면서 효돈(孝敦)이라는 한 마을이었으며, 군위오씨의 집성촌이었다. 1915년 도제 실시로 현재 서귀포를 제주도 우면으로 개칭할 때 '서효'라 부르다가 1934년 우면이 서귀면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서효'는 '상효'로 개명됐다.

이후 1948년 4·3 때는 소개하여 이웃 마을로 흩어졌다가 이듬해 주민들의 원에 의하여 복귀됐고 1953년 임시 행정조치로 상효 1, 2리가 분리됐다.
 
6·25 피난민 귀농정착 마을 법호촌

상효2리는 1리에서 동북쪽 1.5km 거리에 있다. 1560년 정(鄭)씨가 정착해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마을 동북쪽 500m 지점에는 소가 누운 형국의 칡오름이 있어 이 때문에 과거 주변 마을을 웃쇠돈(上孝), 중쇠돈(中孝), 알쇠돈(下孝)으로 이름붙여 불러오다가 그 후 '우(牛)'자의 뜻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이 효(孝)를 숭상하는 뜻에서 효돈(孝敦)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온다. 상효2리에는 1660년께 고(高)씨, 김(金)씨, 오(吳)씨, 현(玄)씨, 강씨들이 정착, 집단부락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한편 상효3리였던 영천동에는 100여년전에 5∼6세대가 거주하였다고 하나 고증할 자료가 없으며, 일제시대에는 역시 상동 '배낭골'에 일본인 중원(中原)의 토지 관리인 3∼4세대가 살았었다. 이후 4·3사건으로 마을이 흩어지자 여기는 상 하효, 신효리의 공동목장으로 이용됐었다. 6·25 이후인 1955년 10월 13일 피난민으로 구성된 제주난민 귀농정착 개척단이 입국해 '가나안 촌'을 형성, 이후 법호촌으로 개명됐다.
 
▲ 한라산 백록담

수직으로 선 커다란 암석 '선돌'
동·서상효 표제단 있던 '칡오름'

영천동 지역에서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9곳을 '영천구경(靈泉九景)'으로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

'영천구경'은 '돈내코 계곡'과 '한란자생지', '백록담', '영천악', '칡오름', '선덕사', '검은여에서 소정방폭포에 이르는 해안', '선돌', '약초원'.

백록담과 돈내코는 영천동을 상징하고 선돌은 커다란 암석이 수직으로 서 있다고 해 불리며 이 일대에는 주변살림이 울창해 무릉도원 같은 느낌을 준다.

영천악에는 과거 관청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영천관아지터를 비롯해 유명한 사찰이었던 영천사지터, 제주목사가 순례 시 쉬기 위해 항상 들렸다는 여기소가 있는 등 지명그대로 신령스러운 천(泉)이 있는 산이다.
검은여에서 소정방폭포에 이르는 해안은 해안 경승지이며, 문화재 2곳을 소장하고 있는 선덕사는 주변의 울창한 산림과 어울려 고풍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칡오름은 동·서상효 포제를 봉행하는 포제단이 있으며, 빽빽이 우거진 산림과 쾌적한 공기와 어울려 삼림욕장으로 인기다.
약초원은 과거 약초단지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제주대학교식물원, 산악인 오희준 추모공원, 석주명동상이 있는 나비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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