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재래시장은 물건이 교환되고 사람들의 거래로만 이루어지는 단순한 장소는 아니다. 시장에는 백화점이나 대형할인매장처럼 번듯하고 세련된 맛은 비록 떨어지지만 우리 이웃들의 진솔한 삶의 얘기가 오가고 날로 각박해져 가는 세상을 살맛 나게 하는 정이 흐르기 때문이다. 상인과 손님간에 오가는 왁자지껄한 흥정은 생의 활기를 잃고 의기소침해 있던 사람들에게 저것이야말로 ‘생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제 현대화의 대세에 밀린 재래시장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동문시장·민속오일시장과 더불어 제주시의 3대 시장 중의 하나로 군림했던 서문시장도 건전지가 바닥난 시계처럼 활력을 잃고 상인들은 물론 그곳을 자주 찾던 시민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예전엔 손님 많아 짜증이 날 정도

동문시장과 같은 시기(1954년 11월)에 개설된 서문시장은 처음에는 오일장과 함께 자리했다. 지금은 복개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서문다리 밑에 각종 어물과 야채 장사가 많이 있었는데 큰 홍수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한 이후로 그 상인들이 현재의 서문시장으로 옮겨옴으로서 그 규모가 부쩍 커졌다. 이후 오일장이 지금의 삼담 파출소 인근으로 이전해 가면서 서문시장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60년대에는 현재 용담 주유소 자리에 서부 시외버스 터미널이 들어서 상인과 주민들을 위한 교통 편의가 확보되어 있었고 제주중학교 서쪽에 흔히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리던 임시 시장 등과 연계돼 서문시장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1967년 버스터미널이 신축돼 광양 공용터미널로 이전되고, 1971년 옛 오현고등학교 자리에 중앙종합매일시장이 들어서면서 서문시장의 상권은 조금씩 분산돼 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문시장의 주요 고객들이던 제주대학교·제주상고·제주시청·제주경찰서 등이 하나 둘 이전해 가는 1980년 대 후반을 기점으로 ‘손님이 너무 많아 짜증이 날 정도로’호황을 누리던 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서문시장과 인접한 지역에 이마트를 비롯한 각종 대형유통매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비자의 취향이 달라지면서 서문시장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에 놓였다.

80년 대부터 장사를 시작했다는 경성 쌀 상회 김규석씨(53)는 “대형마트 등에 손님을 뺏기고 신세대를 중심으로 한 소비자의 취향이 달라지면서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보다 손님이 3분의 2정도 줄었다”며 “한번 온 손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쌀 한 말을 차에 싣고 노형까지 배달을 하고 나면 기름 값 뽑기도 빠듯한 실정이다”고 말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현대화 사업

급속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대처하고 노후된 시장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서문시장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1995년 12월부터 총 사업비 37억여원을 투입한 이 사업으로 서문시장은 98년 지하주차장 등을 갖춘 지금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하지만 이 현대화 사업으로 서문시장 상권의 회복을 기대했던 상인들은 오히려 예전만 못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심지어 “앞으로 2∼3년 내에 시장의 상권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극단적인 비관론을 펴는 상인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서문시장을 출입하는 유동인구의 숫자는 하루 100∼20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턱없이 적다. 현재 서문시장의 점포수가 80여 개인 점을 감안한다면 ‘마수걸이’도 못하는 가게도 많다는 결론이다. 이는 서문시장이 속한 용담1동의 전체 인구수가 97년 1만3500명에서 올해 9700명으로 급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도시계획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비성향이 강한 중산층 이상의 주민들은 용담동을 떠나는 추세인 데다가, 영세층의 유입은 상대적으로 늘면서 서문시장의 주요 고객이어야 할 용담동주민들의 구매력이 약화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상인들간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이며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건물 내 점포 배치문제다. 현재 서문시장 건물 1층에는 대부분 식당이 자리하고 있고, 2층에는 포목점 등이 들어서 있다.

2층 상인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시장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포목점이 1층에 자리잡고 손님들을 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2층에 입주해 있는 한 상인은 “하루종일 있어도 손님 한 명 없이 공치는 날이 많다”며 “계단 등 진입로가 불편해 나이든 단골 손님이나 주변 호텔 등의 투숙한 외국 손님들은 이곳에 포목점이 있는 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며 울상을 지었다. 또한 아래층 식당에서 올라오는 각종 음식냄새 때문에 겪는 불편도 심각하다.

이에 대한 1층에 입주한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점포위치 때문이 아니라 구색을 갖추지 못한 시장 물건과 적극적인 서비스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장에서 20년째 식당 일을 하고 있다는 한 상인은 “몇몇 가게를 제외하면 손님 구경하기 힘든 것은 1층 식당 쪽도 마찬가지”라며 “점포 배치를 바꾸기보다는 동네주민이나 외지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몇 차례 중재에 나섰던 한 공무원은 “상인들간의 이해관계가 워낙 심각하게 얽혀 있어 전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으로서는 상인들간의 자율적인 타협이 이뤄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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