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생명숲 곶자왈 연대기] 20.피난처가 된 곶자왈

▲ 선흘곶자왈은 제주4·3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목시물굴 주변에는 돌로 쌓은 주거흔절들이 그날을 상기시키고 있다. 사진은 조천읍 선흘리에 위치한 선흘곶자왈 전경.

만물생활 생활터전 불구 선흘곶 4·3 비극 전해져
「남사록」… '제주 사람들 유사시 피난처 이용'
곶자왈 파괴로 제주고사리삼 등 소멸 우려


4·3에 대한 처참한 기억

겨울 곶자왈은 늘 서늘한 긴장감이 돈다. 차가운 바람과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주는 느낌은 아니다.

겨울 숲은 생존이라는 원초적 욕구와 본능이 가장 치열하게 위협받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특히 포식자들로부터 몸을 숨기며 살아야하는 작은 동물들에게 겨울은 고통스런 계절이다.

추위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하는데다 먹을 것은 부족하고 나뭇잎과 풀도 떨어지고 사그라져 몸을 숨기기조차 힘들어진다. 그러기에 겨울에도 따뜻하고 얼기설기 돌과 나무들이 뒤엉킨 곶자왈은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더욱이 겨울에도 동백나무와 종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를 비롯한 늘푸른잎 나무들이 무성한 선흘곶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는 사람들이 숲을 떠나 잊고 살지만 숲은 오래된 인류 문화기원이자 생활터다. 선흘곶에서 발견된 숯가마를 비롯해 움막, 노루를 비롯한 동물을 잡기위한 노루텅이나 농경지를 일구던 흔적들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주민들이 이곳에서 살아왔음을 보여주는 생활유적이다.

하지만 선흘곶을 찾을 때마다 지독히 가슴 저미는 것은 4·3에 대한 처참한 기억 탓이다.

선흘곶에 있는 도틀굴과 목시물굴에 1948년 11월 21일 선흘리 주민들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피해 숨어들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은 25일에 도틀굴에 있던 마을주민들이 발각돼 18명이 죽임을 당했고 26일에는 목시물굴에 있던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벤뱅듸굴에는 도틀굴과 목시물굴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몸을 피한 주민들이 숨어있었는데 27일에 또다시 25명이 학살을 당했다.

지금도 목시물굴 주변에는 돌로 쌓은 주거흔적들이 남아 그날을 기억한다.

이렇듯 선흘곶을 비롯해 곶자왈은 4·3광풍속에 죽음을 피해 달아나 살았던 피난처이자 학살터가 됐다.

한경면 산양리에 위치한 한수기곶은 4·3초기 한림과 대정 무장대가 근거지로 이용했던 곳이며 이후 토벌대를 피해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곳이다.

4·3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 배경인 동광리 큰넓궤를 비롯해 도엣궤(안덕면 동광리), 왕모르곶(조천읍 와산리) 처럼 나무가 우거진 곶자왈이나 곶자왈내 동굴, 궤마다 주민들이 목숨을 구하고자 숨어 들어갔으나 토벌대의 총칼은 곶자왈 곳곳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아픈 상처만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4·3만은 아니다. 난리를 피해 제주사람들이 곶자왈로 숨었다는 옛 기록이 있을 만큼 어쩌면 제주땅에서는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시절이 연속이었다.
1601년(선조 34) 길운절 모반사건때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된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남사록 南?綠」을 남겼다. 「남사록」에는 "곶(藪)이 매우 많은데 둘레가 50여리 되는 것도 있으며 상수리와 무환자, 산유자, 참나무 등 여러 나무가 울창하다" 며 곶자왈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남사록」에는 '제주사람들이 유사시에 곶자왈에 모여 숨어 난을 피했다.(州人有事則聚隱其中以避患)'는 내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제주땅 안팎에서 난리는 끊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제주사람들은 동물처럼 숲으로 숨어들어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곶자왈이 사람들만을 위한 피난처는 아니다. 목시물굴 옆을 둘러보니 돌 무더기가 쌓인 습지에서 제주고사리삼 한 무더기가 겨울을 나고 있다. 이곳 선흘곶에서만 서식하는 세계적 멸종위기종인 제주고사리삼에게도 곶자왈은 마지막 피난처인 셈이다.

온난화 기후속에 곶자왈에서 더위를 피하며 살아가는 한들고사리와 좀나도히초미, 좀고사리, 골고사리, 큰톱지네고사리를 비롯한 북방계식물이나 겨울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남방계식물인 개톱날고사리, 밤일엽, 큰봉의꼬리, 빌레나무에게도 곶자왈은 생명을 지켜주는 곳이다.

하지만 탐욕이 그치지 않는 한 곶자왈도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없다.

60여년전 광기와 야만과 폭력은 그저 살아보고자 곶자왈에 숨어들었던 제주사람들을 처참하게 죽였다.

이제는 숱한 동물과 식물들에게 생명을 주던 곶자왈 마저 끊이지 않는 탐욕과 폭력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특별취재팀=김영헌 정치부 차장, 고경호 사회부 기자 ▲외부전문가=김효철 (사)곶자왈사람들 상임대표.

 

▲ 목시물굴.
4·3당시 피난처로 유명

피난처인 곶자왈. 그 가운데 선흘곶은 4?3당시 피난처로 유명하다. 「남사록」에서 말하는 환난을 피했던 곶자왈이 어딘지는 분명치는 않으나 선흘곶을 비롯해 마을과 멀지않은 곶자왈 지대가 중요한 피난처였음은 분명하다.

곶자왈이 피난처가 된 데는 우선 선흘곶이나 한수기곶처럼 수백만㎡에 이르는 넓은 면적인데다 나무와 덩굴이 무성해 마을사람들도 쉽게 길을 찾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4?3 당시 선흘리 주민들이 학살당한 도틀굴이나 목시물굴, 벤뱅듸굴도 토벌대들이 고문끝에 마을주민을 앞세우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독특하게 숲속에 동굴이 발달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대체로 동굴은 조밀한 용암지대에 형성되기 때문에 곶자왈처럼 숲이 발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선흘곶은 곶자왈이면서도 점성이 낮은 파호이호이용암이 흐르며 동굴이 만들어진 탓에 울창한 숲 가운데 동굴이 자리하고 있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몸을 숨길 공간은 생명보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셈이다.

여기에다 생존에 가장 필요한 물까지 가까이 있었다. 파호이호이용암류로 이뤄진 선흘곶이나 월림신평곶자왈은 숲 사이 숨겨진 듯 고여있는 연못을 볼 수 있다. 선흘곶에도 봉근물이 있듯 한수기곶에도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인 봉근물이 있어 숲에 숨어든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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