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제주잠녀'6부-제주해녀문화목록 바깥물질 2

▲ 제주잠녀들의 바깥물질은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강화도조약 이후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이 조선의 수산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나라의 해안에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출가물질에 나서는 잠녀들의 모습으로 구덕에 당시 물질에 쓰이던 뒤웅박 등이 보인다.
경제적 목적·역사적 배경 등 이유 다양해
자료 부족…귀향·재이동 여부 알 수 없어
'제주도식 물질 기술·문화'로 존재감 부각

억척스런 '아주망'들이 만든 '작은 제주'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바깥물질'이란 것이 단순히 '돈'을 따라 움직인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누군가는 경제적 여유는, 누구는 어려운 살림을 일으켜 세우려 짐을 쌓다. 부득이 섬을 떠나 자리를 잡으며 본능처럼 테왁을 챙긴 사람들도 있다. 물질을 하며 배운 공동체 문화는, 성질의 '성'을 딴 후천적 집성촌을 만들었다.

1985년 부산 물질 시초

연구자들의 자료를 정리해 보면 제주잠녀들의 바깥물질을 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압적으로 맺어진 강화도조약 이후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이 조선의 수산자원을 약탈하기 위한 계획을 사전에 세워놓고 우리나라 남해안과 동해안은 물론 제주연안까지 눈독을 들였던 것만 봐도 유추가 가능하다.

일본 학자 마스다 이치지는 '제주도해녀(濟州島海女)'(1976)에서 부산항 개항이후 20여년이 지난 1895년에 부산부(釜山府) 목도(牧島, 지금의 영도)로 처음 바깥물질을 나갔다고 기술했다. '몇 명'이 '어떤 과정'으로 '무엇을 위해' 바깥물질을 나섰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저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한국의 남동해안 어장으로 우뭇가사리와 감태 등 일부 해조류를 채취하기 위하여 아마(ぁま.일본 해녀)들을 동원한 사실을 들어 바깥물질 초기 제주해녀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부산(부) 목도로 진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아예 나라 밖으로 나간 것은 8년 후인 1903년 일본 동경 미야케지마(三宅島)로 알려진다.

1932년에 진행된 마스다 이치지의 자료로 추정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지 이후 일정 기간 잠녀들의 바깥물질과 관련된 연구결과나 발표된 통계는 확인이 어렵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5년께 일본 물질을 나선 잠녀 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석주명은 제주도수필(1968)에서 당시 타 지역으로 2500여명이 바깥물질에 나섰다고 썼다. 경상남도로 이동이 가장 많았고 전라남도와 그 외 지역으로 이동을 했다는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이다. 그중 우도(연평리) 출신이 약 400명이고 종달리와 행원리, 법환리, 위미리가 각각 100명, 나머지는 기타 마을 출신으로 파악했다. 당시는 해초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일본인 중개상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진출했던 때였다.

▲ 일제 강점기 제주잠녀들의 작업 모습
외부 환경 영향 많이 받아

1912년께 제주잠녀들은 일본의 쓰시마(對馬島)로 바깥물질을 나선 것 역시 이런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제주도해녀어업조합 설립(1920년) 이후 바깥물질에 참여하는 잠녀 수가 계속해서 늘었다.제주-오사카(大阪) 사이를 오가는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ヶ代丸) 취항 영향으로 오사카는 제주 잠녀들의 거점이 됐다. 잠녀들의 바깥물질이 전성기를 이뤘던 1930년대는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층 강화됐던 때였다. 잠녀들의 능력이 타 지역은 물론 일본 아마를 훨씬 앞서며 그들의 역할을 대체하기도 했거니와 때마침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 등으로 감태(화약의 원료) 생산에 열을 올리게 되는 안팎 사정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마스터 이치지의 자료에는 또 1939년 중국 칭타오 진출 기록까지 나온다.

많은 수의 잠녀가 이후 얼마나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 내에서도 일을 찾아 이동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 기록은 단순히 '바다를 건넜다'는 의미 그 이상은 갖지 못한다.

물질 기술과 문화 전파 의의

해방 이후에도 잠녀들의 바깥물질은 계속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정부수립(1948년 8월)과 제주 4ㆍ3사건(1948년 4월), 한국전쟁(1950년 6월)과 휴전(1953년 7월)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했고 또 그 뒤로 이어지는 5ㆍ16 군사정변(1961변 5월) 등으로 구체적인 통계는 확인하기 어렵다. 연구자들의 조사 자료 중에 1950년대에 경상북도 독도로 나간 사실이나 1960∼70년대 충청남도 외연도, 1960년대 후반 전라남도 여수 등지로 나간 사례로 바깥물질의 맥이 이어졌다는 점을 유추할 뿐이다.

이후 바깥물질은 전적으로 잠녀들의 선택이다. 지금도 바깥물질을 나서는 잠녀들을 찾을 수 있다. 홍.흑해삼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서해안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잠녀들이 있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잠녀들은 이미 현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잠녀들의 바깥 물질은 전문적 기술 집단의 이동이라는 점이다. 아시아 문화권 내에 잠수기술과 제주문화를 전파하는 중요한 핵심 축이었다는 얘기다. 잠녀들이 타 지역이나 일본에 진출한 이후 '제주도식 물질 행태'가 자리 잡은 곳이 많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아예 '물질'기술이 처음 전파된 곳도 많다. 이후 바다밭의 효율적인 운영방식이나 조직(잠수계), 공동작업 등을 통한 이익 분배 등이 이뤄졌다. 잠녀들이 몸에 익힌 민속지식이 지역 특성과 어우러지며 새로운 생활 문화를 형성했다. 바다를 건넌 사정이야 여러 가지였지만 이를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또 문화를 만들었던 그들을 '유목적 주체(Normadic Subjects,여성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로 이해해야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고미 기자

▲ 다쿠 '해녀 양씨'에 등장하는 양의헌 할머니
재일 제주인 1세대 '양의헌 할머니'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해녀 양씨'(감독 하라무라 마사키)는 지난 2004년 만들어졌다. 사쿠라영화사에서 만든 이 작품은 하라무라 감독이 낡은 흑백 필름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하라무라 감독은 재일동포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하라무라 감독은 재일동포 3세와 일본 젊은이들의 만남을 다룬 '조우'라는 작품을 내놓는 등 재일조선인 작품을 6편이나 만들어냈다. 그런 그가 1960년대 양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미완의 필름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재일동포 1세 신기수씨가 찍은 필름 속의 양 할머니에 관심을 둔 하라무라 감독은 할머니를 찾아내 기록물을 완성했다.

'해녀 양씨'는 2004년 4월8일 도쿄에서의 첫 상영회를 시작으로, 일본 각지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그 해 '해녀 양씨'는 일본 문화청이 주관하는 제2회 문화청 영화상에서 '문화기록영화' 대상 을 수상했다.

우리나라는 물론 제주에서도 지난 2006년 해녀박물관 개관을 기념한 순회 상영회가 진행됐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가족 부양을 위해 물질을 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할머니는 식민지 시대와 제주 4.3, 북송 등으로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만 했던 재일제주인들의 근대사와 평화의 상징으로 깊게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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