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제주대 건축학부 교수·논설위원

최첨단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지금도 건축계에서는 '컨텍스트' 또는 '맥락'이라는 단어에 함몰되어 부질없는 논쟁을 하고, 재미없는 도시와 건축을 만들고 있다. 이 단어 때문에 젊은 건축가들은 건축심의에 불편을 느끼고, 이들의 창조적 재능은 퇴비처럼 묵혀지고 있다. 
 
우리의 도시와 젊은 건축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컨텍스트'는 무엇인가. 이제 건축계와 우리는 이 단어가 가진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 이 단어가 만든 오독의 도시에서 벗어나 풍부하고 창의적인 도시로 가야할 때가 됐다.
 
컨텍스트와 관련된 이야기는 1950년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된다. 건축가 로저스는 당시 밀라노에 지어지는 건축물들이 지역적 특색도 없고, 역사성도 없다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프레지텐쯔 앰비엔탈리(주위를 둘러싼 존재들)'이라는 단어를 쓴다. 건축은 그 주변의 자연경관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역사적 연속체로서 지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후 이 단어가 영어로 '컨텍스트'로 번역이 되면서 불행한 건축 역사가 시작되고 말았다.
 
건축가 로저스는 영어 '컨텍스트'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인 '콘테스토'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콘테스토'로는 그가 담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히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건축을 지을 때, 주위를 둘러보고, 그 주위에 역사적인 건축물이나 빼어난 자연경관이 있을 때 그 존재들을 고려해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콘테스토'는 단순히 주위의 맥락에만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단어였다.
 
1960년대 중반 로저스의 '프레지텐쯔 앰비엔탈리'는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에 의해 재조명을 받는다. 그는 그의 책 「도시의 건축」에서 로저스의 단어를 가져다 '앰비엔테'로 다시 썼고, 이 책은 건축계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앰비엔테'는 '컨텍스트'로 번역됐다. '앰비엔테'가 가진 깊은 의미는 소거되고, 단순한 껍질만 남는 오독과 오번역이 일어난 것이다.
 
껍질만 남은 단어였지만, '컨텍스트'는 미국에서 건축과 도시의 신개념어로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단어의 전도사가 된 사람은 미국 코넬대학의 교수였던 콜린 로우였다. 콜린 로우는 그의 수강생들과 건축계에 컨텍스트를 도시와 건축을 새롭게 하는 개념으로 전파했고, 1970년대 미국 도시와 건축에서 '컨텍스트' 개념은 보편화됐다. 이 단어의 원저자인 알도 로시는 '컨텍스트는 도시의 건축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했지만, 이미 미국 전역에 퍼져버린 '컨텍스트' 만능주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미국 건축계에서 '컨텍스트'가 열병처럼 퍼지던 1970년대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건축학도들의 미국 유학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미국에서 컨텍스트를 공부했던 건축학도들은 귀국 후 우리나라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이들은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컨텍스트'가 오독의 산물이라는 것도 모른채, 이 개념을 서양의 신학문으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도 '컨텍스트'는 거부할 수 없는 건축의 교조주의가 됐다. 지금도 가끔 건축심의에 '컨텍스트'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 기성세대가 그 지독한 오독의 산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건축가들이 '컨텍스트'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지금은 풍부하고 창의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컨텍스트'라는 단어 자체를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현실은 우물안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산지에서도 이미 폐기된 단어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젊은 건축가들의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산지폐기된 '컨텍스트'에 막혀있다. 이제 '컨텍스트'로 만들어진 오독의 도시를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가득한 우리의 도시를 만들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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