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현기영 글·박재동 그림 「똥깅이」

▲ 「똥깅이」 중 한 장면

꿈꾸는 '무한 자유' 제공

유년시절·제주 4·3 담아
똥깅이 결핍…성장 영향
 
학생들에게 꿈을 묻는 것이 난감한 시대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과학자가 되고 싶고, 화가가 되고 싶고, 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아이들이 자라면서 "글쎄요"라며 머리를 긁적인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이 반격을 당한지 오래다. 그래도 꿈 하나 가슴에 안고 있으면 하는 행복하지 않냐는 말이 허망하다 싶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꿈과 이상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꿈 꿀 수 있는 권리는 챙기자며. 
 
꿈을 보여줄 수 있는 어른이 주변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꿈을 보여주는 이는 없고, 가능성은 자꾸만 줄어드는 것만 같아 씁쓸하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라도 꿈을 찾아보자고 부추긴다. 현실화되진 않았어도 꿈 꾸는 자유만이라도 보여주는 책 말이다.
 
그래서 들여다보게 되는 책이 현기영의 「똥깅이」다. 제주출신 작가라는 이유만으로도 뭔가 꿈이 가까워지는 기분이랄까. 은근한 친밀감이 거친 마음을 누그러뜨려준다. 
 
현기영의 성장소설 「똥깅이」는 1999년에 출간된 「지상에 숟가락 하나」의 청소년판이다. '똥깅이'라는 주인공의 별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다냄새가 나는 소설이다. 4·3이라는 현대사의 거대한 산불로 인한 검은내음이 진하게 배어있기도 하다. 가난과 역사의 폭압으로 인해 잃어버린 유년이 바다 내음과 산불의 몽환적 향내로 붙잡을 수 없는 그리움을 자극한다. 똥깅이, 누렁코, 웬깅이 등 왠지 이름이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어린시절의 친구 이름들 같다. 물론 청소년들에게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갈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그들 부모 세대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열두어살에서 열예닐곱살 까까머리 소년의 얼굴이 자꾸 보인다. 바닷가 돌 틈에서 게를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대숲에 숨어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한다. 무뚝뚝한 어머니의 머릿수건에서는 땀내가 진하게 흐르고 그 등허리를 가만 바라보고 있기만 한 소년. 한 번만이라도 안아줬으면 하고 바라건만, 한시도 쉴 틈 없이 손을 움직이는 부지런함 앞에 가슴이 먹먹하다. 그래서 꿈을 꾼다. 저 어머니의 등처럼 단단하게 굳은 이 땅을 벗어나고 싶다고.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아버지를 찾아나서겠다고. 
 
▲ 지난해 7월 제주도립미술관 강당에서 열린 '현기영 작가와 함께하는 똥깅이 북콘서트'에서 현기영 작가(오른쪽)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료사진
작가는 말한다. "한 인간개체가 어떻게 자연의 한 분자로 태어나서 성장하는가를 반추해보려는 의도에서 씌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연을 상실하게 되는 중3에서 끝나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그러니 이 소설은 적어도 청소년 시절에 모든 꿈 꿀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씌어졌으리라. 
 
「똥깅이」에서 작가는 파편처럼 흩어졌던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청소년 시절의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은 어린 시절 가장 큰 상처였음이 짐작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상실감은 그에 못지 않았고, 말하지 않는 분노와 증오, 슬픔이 아린 비수로 박혔다. 거기에다 4·3의 회오리는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불안감을 조장했을 터이다. 집을 나간 아버지에 배신감, 어머니의 슬픈 등, 조부모와 외조부모의 보살핌, 불 타버린 집, 이성에 눈 뜨기 시작하던 날들의 몽정, 가슴의 응어리를 씻어주던 바다, 그리고 신석이 형.  
 
콧물 질질 흐르던 똥깅이에게 꿈을 심어준 건 결핍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내면의 빈공간이 누구보다도 많았다는 것, 홀어머니와 살면서 꿈을 키우고 있는 신석이형의 건강한 삼두박근. 국어선생님을 통해 만난 이상, 김유정의 소설. 그 무엇보다도 돌처럼 굳은 마음을 환히 씻어주는 제주의 바다. 이런 것들이 어린 똥깅이에는 먼 바다 너머를 꿈 꾸게하는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정말 그는 꿈처럼 작가가 됐으니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 무색하지 많은 않다.  제주대 평생교육원 강사

결핍…성장 필수요소로 작용

■ 작가의 말

직업군인 아버지 부재, 문학에 많은 영향 미쳐
아름다운 제주자연 비극적인 4·3의 상처 치유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성장소설의 성격을 띠는 글인데 무게중심은 '이념'보다는 그 시대의 '현상'입니다. 내 유년의 현상, 그러니까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수맥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요. (중략) 내 문학을 결정지은 배경이 여기에 나옵니다. 나를 키운 것은 부모님만이 아닙니다. 제주의 자연도 나를 성장시키는 데 큰 몫을 했지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부재가 나를 편모슬하의 야릇하고 반항적인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돌아온 아버지와는 극한 대립까지 가게 됩니다. 아버지의 그런 부재가 나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이 계절의 작가」, 「실천문학」 1995년 여름호 중에서

아이에게는 어서 그날, 그 시간이 왔으면 하고 뭔가 기다리는 것이 항시 있었다. 밭에 간 엄마를 기다리고, 흰 쌀밥 한 숟갈, 돼지고기 한 점 먹고 싶어 제삿날, 명절날을 기다리고, 즐거운 소풍, 즐거운 방학을 손꼽아 기다릴 때, 시간은 얼마나 느리게 달팽이처럼 기어가던가.(중략)그러던 내가 지금은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보다 더 많아진 인생이 되어, 남은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고 한탄하면서 조금이라도 벌충해 보겠다고 이렇게 상상에서나마  어린시절을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있는 것이다. - 「지상에 숟가락 하나」 중에서.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결핍이라는 것이 성장에는 필수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지 물질적인 결핍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 또는 마음의 결핍까지도 포함한다. 무언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이 시대에 결핍이 오히려 꿈의 자리를 화보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이 얼마나 희망적인 말인가.

「똥깅이」에서는 제주의 아픔이 고스란히 묘사되고 있다. 격동기 마다 휘몰아치는 흉년과 전염병, 더욱이 제주는 거친 파도와 태풍이 거의 공포에 가깝다. 거기다가 섬이라는 공간적 답답함과 바다 너머를 알 수 없는 불안, 그리고 아무 때고 찾아와서 난리를 만드는 외세의 끔찍한 살육과 폭력. 이들이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만나 한 소년을 성장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말끔히 씻어주는 건 무엇보다 바다라는 자연이었다는 사실.

똥깅이의 머리는 땜똥머리였다. 매미를 잡다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에 말발굽 같은 흉터가 생긴 것이다. 이는 평생 콤플렉스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역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미 남의 보리밭이 되어버린 집터 한쪽에 서있는 시누대숲과 저 홀로피어 부질없이 화사한 배롱나무 붉은 꽃무더기가 초토화된 4·3항쟁의 역사를 쓸쓸히 말해 주고 있다"는 말 속에 개인사적 모든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다. 그렇기에 '나'는 지워지고  그 안에 꿈틀거리는 꿈마저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을.

이처럼 오늘의 우리도 결핍과 부재를 마른 씨앗처럼 말리고 말려서 돌아오는 봄날에 연두 씨앗 하나 싹을 틔우는 보람이라도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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