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1. 김녕곶<1> 지명 유래와 생활사

땔감·농기구 등 자원인 참나무 수종 많아 주민 일상생활 '영위'
숯가마·숯막·노루텅·제단·연못 등 다양한 생활유적도 발견돼
고문헌·고지도에 기록된 김녕곶(김녕수)이 언제 어떤 이유로 선흘 곶자왈로 지명이 바뀌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 연구과제로 남고 있다. 곶자왈을 이용했던 마을 고령자들 역시 어릴 때부터 선흘 곶자왈로만 불러왔을 뿐 옛 지명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선흘리에서 시작해 김녕리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숲 지역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관(官)에서 주민들의 인식 정도보다는 지역상황을 반영해 역사가 오래되고 마을규모가 큰 김녕(리)을 숲 지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곶자왈
제주사회의 시대상을 정리한 여러 고문헌과 고지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김녕곶은 오래전부터 지역 주민들에게 인식돼왔던 곶자왈로 추측되고 있다.
김녕곶은 고문헌 중 가장 오래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부터 「탐라지」(1653), 「남환박물」(1704), 「탐라지초본」(19C 중반), 「제주군읍지」(1899), 「증보탐라지」(1954)는 물론, 고지도 중에서는 비교적 오래전에 제작된 「탐라지도병서」(1709)와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1)」(1750), 「제주지도」(1872)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문헌에 기록된 김녕곶의 위치는 제주성 동쪽(제주목성 동남쪽) 50리, 둘레 50여리로 표기돼 있으며, 고지도인 「제주삼읍도총지도」에는 지금의 조천읍 선흘리, 구좌읍 동복·김녕·덕천·행원·한동리에 걸쳐 표시돼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고문헌이나 고지도를 편찬·제작하던 당시 김녕곶은 가장 널리 알려진 곶자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고문헌이나 고지도에서 가리키는 김녕곶은 오늘날 김녕리 묘산봉 남쪽지구에 전개되는 '선흘 곶자왈'을 의미한다.
현재 송시태 박사가 용암류를 기준으로 4개 권역 10개 지역으로 구분한 곶자왈 분포지역 중 선흘 곶자왈은 동부지역의 조천-함덕 곶자왈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지구 중 하나다.
△마을 주민 경제활동 무대

다른 곶자왈과는 달리 마을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마장이 있던 중산간 목초지에 놓은 불(방애불)이 번져도 주민들이 습지를 이용해 비교적 불길을 빨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땔감을 비롯해 집을 짓거나 농기구와 숯을 만드는데 중요한 자원인 참나무 수종과 크고 곧은 나무들이 많아 일상생활에 필요한 재료를 선흘 곶자왈에서 구했다.
김녕 등 주변 해안마을에서도 배의 돛과 노를 만들거나 겨울 채비용 임산자원을 구하기 위해 선흘 곶자왈을 이용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좌읍 김녕리에는 해녀들에 의해 전승되는 민요 중 '해녀 노젓는 소리'가 있는데, 이 민요의 노랫말 중에는 "노가 부러지면 선흘곶에 곧은 나무가 없을 소냐"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처럼 경제활동이 집중되면서 자연스레 지명도 선흘 곶자왈로 불린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를 방증하듯 선흘 곶자왈 내에서 숯생산(곰숯가마)·주거(숯막)·농경(경작지 돌담)·사냥(노루텅)·음용수(연못)·신앙(제단) 등 크게 6가지 형태의 생활유적이 발견됐다.
선흘리에서 11대째 살고 있는 안흥수씨(1939년생)는 "중산간 마을인 선흘리와 북쪽 해안마을인 김녕리간 물물 교환이 활발히 이뤄졌다"며 "선흘 곶자왈은 목재 자원이 풍부해 선흘리는 물론 이웃 마을 주민들에게 생활수단이자 보물창고와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사회부 한 권·고경호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하나는 과거로부터 선흘리 주민들이 활동하며 사용해 온 생활유적이 비교적 좁은 공간 안에 밀집돼 분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좁은 공간이란 약 2500평(8250㎡) 정도의 공간적 범위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곰숯가마를 비롯해 1회용 숯가마, 숯막, 노루텅, 산전과 머들 등 다양한 생활유적이 분포한다.
따라서 생활유적이 밀집된 공간은 선흘리 주민들이 시기를 달리하면서도 일정 기간 동안 농업생산과 숯굽기, 노루사냥 등 경제활동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처럼 숲이 우거진 곶자왈 내부의 일정지구에서 과거의 경제활동과 관련된 다양한 유적이 발굴됐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과거 제주도 생활역사와 문화의 한 단면을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가치는 실로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선흘 곶자왈 내의 밀집된 생활유적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기간이 중간에 협재되면서 시대를 달리하는 유적들이 특정 장소 내에 중첩돼 존재하는가 하면, 또 일부 유적들은 선세대에서 후세대로 이어지며 일정기간에 걸쳐 재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생활유적들은 과거 선흘리에 거주했던 즉 한 세대를 앞서 살다간 선조들이 사용했던 유적인 동시에 시간이 흘러 후세대들이 다시 활용하며 만들어낸 유적들이라는 점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