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3. 머들(흘)곶<1> 마을 품은 곶자왈

▲ 4·3 당시 지금의 애월곶자왈인 '머들곶'은 원동마을 주민들의 피신처였다. 사진은 애월곶자왈 내 돌로 쌓은 은신처로 김태수 납읍리노인회장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고지도 '뇌수'로 표기…'정잣냇곶' '머들곶'으로 불려
주민 "암반 많아 척박한 땅" 인식…4·3 은신처 확인
곶자왈 관문 '원동마을' 1948년 학살·방화로 사라져

제주4·3 당시 벌어진 토벌대의 중산간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곶으로 찾아들었다. 중산간 마을의 일부 주민들이 해안으로 소개돼 내려오기도 했지만 많은 주민들은 곶 안의 궤(동굴)로 몸을 숨겨야 했다. 주민들의 피신처이자 은신처였던 머들곶에는 역사의 아픔이 깊게 서려있다.

△돌무더기가 많은 덤불

여러 고지도들 가운데 곶자왈이 가장 많이 기재된 「제주삼읍도총지도」(1770년대)에 등장하는 머들(흘)곶(뇌수)은 현재 4대 곶자왈 중 하나인 애월곶자왈의 일부 지역이다.

송시태 박사가 용암류를 기준으로 세분화 한 10개 곶자왈 분포지역으로는 노꼬메오름 북쪽의 납읍·원동 곶자왈에 속한다.

머들곶(머흘곶) 지명에 대한 기록은 지난 2007년 오창명 교수가 펴낸 「제주도 마을 이름의 종합적 연구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의 '정잣냇곶'은 「제주삼읍도총지도」에 뇌수로 표기됐다.

정잣냇곶(정짓냇곶)은 정잣내(정짓내) 가까이에 형성된 곶이라는 데서, 머들곶(머흘곶)은 돌무더기가 많은 덤불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기록됐다.

제주시·제주문화원의 「제주시옛지명」에서도 '머흘'은 '머을' '머들'이라고도 하는데 가시덤불과 돌무더기가 많은 땅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선조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옛 지명의 유래를 유추할 수 있다.

4·3 때 마을이 전소돼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으로 남아있는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은 머들곶을 드나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김태수 납읍리노인회장(73)은 "머들곶은 돌이 많고 물이 빨리 빠지는 아주 척박한 땅이다"며 "애월읍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곶자왈"이라고 말했다.

▲ 지난 1990년 8월 잊혀가는 마을을 기리기 위해 원동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지' 특별취재팀
△잃어버린 마을 원동

원동(院洞) 마을은 예부터 마을을 가로지르는 '원내'를 기준으로 동쪽의 소길리 원동과 서쪽의 상가리 원동으로 나뉘었다.

소길리 원동에는 조선시대 때부터 길손들이 쉬어 가기 위한 '주막'이 있었으며, 제주목과 대정현을 오가는 목사·판관·교수 등 관리들이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타고 온 말을 쉬게 했다.

제주4·3 당시에는 각각 13가구와 5가구 가량이 부락을 이뤘다. 마을 뒤편 머들곶의 척박한 땅을 개간해 감자·메밀 등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해 온 원동마을 주민들은 1948년 11월13일 '집단학살' 이라는 비극을 마주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기록을 보면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며 원동마을을 찾은 토벌대는 무장대의 위치를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을주민 50~60명을 무차별 학살했으며, 마을 또한 불에 타 사라졌다.

마을 뒤편 머들곶에 몸을 숨긴 일부 주민들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지금도 머들곶 내에는 4·3 당시 주민들이 숨었던 은신처가 원형 그대로 확인되고 있다.

소길리 원동마을은 초토화 작전 이후 지도상에서 사라진 채 현재까지 '잃어버린 마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원지'라 쓰인 비석만이 한때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한 권·사회부 고경호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인터뷰 / 원동마을 생존자 고남보 할아버지

1948년 11월13일 원동마을에서 자행된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고남보 할아버지(83)는 "그 때 아버지와 누이, 동생이 희생됐다"며 힘들게 기억을 떠올렸다.

고 할아버지는 "17살 때였다. 새벽 4시쯤 군인 두 명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서는 자고 있던 우리 가족을 깨웠다"며 "이들에 의해 끌려간 곳에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무장대가 숨어있는 곳을 말하라며 군인들의 협박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이어 "군인들이 주민들 손을 뒤로 돌려 밧줄로 결박했는데 나만 앞으로 손을 묶어 놨다"며 "이날 오후 5시쯤 군인들이 '너희는 10분 내로 총살된다'고 했다. 앞으로 묶인 결박을 풀어놓고 있던 나는 군인들이 한 눈을 파는 사이 머들곶으로 도망갔다"고 말했다.

고 할아버지는 "그리고 얼마안가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다. 한 시간 뒤 다시 마을로 내려가 보니 마을 사람들 통곡 소리가 들렸다"며 "이후 3번의 연발 총성이 있고 난 후에야 우는 소리가 없어졌다. 그 후엔 하늘이 벌겋게 물들 정도로 마을이 불타버렸다"고 회상했다.

이후 고 할아버지는 일주일정도 머들곶에 몸을 숨겼다.

고 할아버지는 "머들곶에 예부터 '돌궤'라고 불린 동굴이 있었다. 그 곳에서 흑가시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겨우 연명했다"며 "돌무더기로 척박한 머들곶을 살기 위해 뛰어 다니며 버텨냈다. 머들곶이 아니었으면 나도 그 때 희생됐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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