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상권 '희망'을 쓰다 8.영해식당 김임순 대표

지난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의미있는 분석 보고서를 내놨다. 한국·일본 성공한 강소(强小)상인 30명의 성공비결을 분석한 결론은 'S.T.R.O.N.G'. '절실함·성실성(Spirit)', '명확한 목표 설정(Target)', '고객관계(Relation)', '고유 아이템(Only one)', '네트워크(Network)', '기본에의 충실(Ground)'의 앞 글자를 모았더니 말 그대로 '힘'이 됐다.
제주특별자치도는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골목상권의 경쟁력과 자생력을 높이기 위한 지원에 나섰다.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통상진흥원(원장 김진석)을 통해 골목상권에 위치한 165㎡ 이하의 소규모 슈퍼마켓, 제과점, 세탁소 및 100㎡ 이하의 일반음식점을 대상으로 시설개선사업(30개소)와 경영컨설팅(100개소)이 이뤄졌다. 올해의 경우 사업제한면적을 100㎡ 이하에서 165㎡ 이하로 상향 조정하고, 지원대상도 일반음식점까지 확대해 점포당 600만원 이내의 시설개선사업과 고객서비스 향상, 경영마인드 혁신을 위한 경영 컨설팅을 했다. '힘'을 얻은 골목상권들의 오늘을 통해 그 비결을 엿본다.
고깃집에서 밀면.소고기찌개 전문 밥집으로 '입소문'
'SINCE 1952년' 청결한 관리.인심 '소통' 역할 톡톡
어머니 20년 이어, 큰아들 3대 물림 준비 '진행 중'
"내 가족을 위한 일이다" 재료와 맛 관리 등 중요
불과 10년 전 만해도 제주 마을들에는 깊고 푸근한 그늘을 가진 폭낭(팽나무)이 있었다. 그 의미란 것이 각별하다. 피를 나눈 것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이웃 사촌간의 인연, '지연'이라 하기에는 보다 살가운 느낌이다. 일부러 정한 것은 아니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중간 위치에 폭낭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마련된다. 특별한 것은 없다. 쉽게 걸터앉을 수 있게 평평한 돌을 옮겨 놓기도 하고 비바람쯤은 끄덕 없는 평상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그 곳에서의 이야기도 정겹다. 누가 불쑥 이야기 거리를 꺼내면 꽤 목차가 알찬 잡지 한 두권을 써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어느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두루 알게 되는 것도 시간 문제다. 62년 한 자리를 지킨 동네식당은 아쉽지만 지금은 하나 둘 사라지고 폭낭을 대신한 소통의 공간이다.

△'폭낭'같은 푸근한 맛
김임순 대표(74)는 올해로 42년째 '영해식당'간판을 지키고 있다. 먼저 어머니가 20년을 지켜온 곳이다. 반 평생 이상을 자리를 지켰으니 말그대로 '폭낭'감이다. 대표라는 호칭에 잔뜩 긴장한 채 '더 할 말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것도 잠시, '어머니'소리에 이내 표정이 풀린다. 김 대표는 "1954년인가 처음 식당을 시작했다고 들었다"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4.3광풍까지 섬을 흔들었을 즈음 여성이 가계를 꾸리는 몇 안 되는 방편이었다. 1973년 전 김 대표가 처음 가게를 이어받았을 무렵은 지금과 달리 '고깃집'이었다. 산업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였다. 불안정한 사회분위기까지 보태지다 보니 그 시절 근고기에 잔술만큼 서민들의 애환을 달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20년 전 메인 메뉴를 바꿀 때까지 동네 사정을 들으며 장사를 했다. 지금도 동네 얘기를 듣는 것은 마찬가지다. 숯불을 피우던 자리에 대신 밀면을 뽑는 기계가 애지중지 자리를 잡은 것만 빼고는.
3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들까지 커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다 보니 점점 장사가 힘들어졌다. 김 대표는 "지역이다 보니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며 "혼자 고기 손질을 하고 숯불가지 피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반평생을 지켜온 간판을 내릴 수는 없었다. "옆에서 그러더라고. 그러지 말고 밥집을 하면 어떻겠냐고. 고민을 많이 했지. 특별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주변에서 맛있다 하는 것 말고 내세울 것이 없었으니까. 당장 손에 들어오는 돈이 얼마나 될지 모르니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도 한 번 해보자 싶어서 메뉴를 바꿨어"
그렇게 '고깃집'은 '그냥 식당'이 됐다. 식사로 팔던 밀면이 대표 메뉴로 신분 상승했다. 김 대표는 "국수도 팔고 그랬는데 이걸(밀면) 그렇게 찾아. 단골 중에는 하루에 2~3번씩 먹으러 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 팔아봐야 얼마나 남겠냐 싶었는데 제법 쏠쏠했다"고 말했다. (고유 아이템.Only one)
△40여년 연륜을 담은 손맛
특별한 것은 없었다. 김 대표는 "손님들이 찾는 것이 그대로 메뉴가 됐다"고 했다. 밀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메뉴 맨 처음에 올렸고, 가족들과 먹던 '쇠고기 찌개'도 슬그머니 메뉴에 포함됐다. 여름 한 철 밀면으로 채웠던 매상을 찬바람이 불 때 쯤에는 몸국이 대신한다.
김 대표는 "일단 먹어보고 말하자"며 서둘러 밀 면 한 그릇을 내밀었다. 말로 하는 것은 맛이 아니라는 지론에 밀려 일단 젓가락을 움직였다. 순간 국물까지 후루룩. 대접 바닥이 드러났다.
전국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깔끔한 맛의 육수를 만드는 데만 꼬박 10년이 걸렸다. "음식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어디 요리책을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순전 감에 의지해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육수를 내는 데 중요한 돼지 뒷다리는 단골 육가공 업체에서 가져온다. 걸어서 2~3분 거리에 있는 모슬포중앙시장에서 매일 아침 신선한 식재료를 공수한다. 김치며 소소한 밑반찬 재료까지 모두 직접 고른다.
김 대표는 "내가 만든 것을 내 아이들이 먹고 자랐고 지금은 손자들이 먹는다"며 "동네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맛인데 소홀히 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재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김 대표 특제 양념장과 청향고추를 넣은 된장 다대기는 한 번 맛본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탐낼 감칠맛을 자랑한다.
제주올레(11코스)가 열리면서 하나 둘 관광객이 늘어나고, 순유입인구 증가로 인근에 터를 잡은 문화이주민이 생기면서 '새 단골'이 만들어졌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며 식당 사진도 찍고 스티커도 가져가고 해서 뭘 하려나 했지. 딸이 그러는데 블로그인가 뭔가에 내가 만든 밀면이랑 식당 이름이 올라갔다는 거야.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했는데 그걸 보고 왔다는 사람이 찾아와. 다시 맛을 잊지 못하겠다고 또 오고. 그래서 세상이 바뀌었구나 했지" (절실함·성실성.Spirit) (기본에의 충실.Ground)

△'관리'의 힘
또 하나 영해 식당의 강점은 '청결한 관리'와 '인심'에 있다. 아직 식당에는 40년도 전 남편이 직접 짰다는 식탁이 있다. 지인의 소개로 제주도경제통상진흥원의 시설개선 및 컨설팅 지원 사업 신청을 했을 때 업력으로는 최고(最古)였지만 매장 관리 상태는 중상 수준이었다. 지원을 받고 간판과 낡은 화장실을 보수했다. 그 동안은 낡은 간판이 '연륜'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간판에 '1962년부터'라고 못 박았다. 누구나 알기 쉽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효과를 봤다. "지나던 길에 간판을 보고 맛이 궁금해서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꽤 된다"는 말에 흥이 실린다.
큰 아들(문석주씨.49)이 매일 제주시에서 대정까지 와 맛을 배우고 있는 것도 김 대표의 흥을 돋운다.
면을 뽑느라 끼니를 놓친 큰 아들의 식사를 챙기는 동안 역시 일을 하느라 밥 때를 놓친 동네 사람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머니 찌개 줍써" 메뉴판에는 김치찌개와 쇠고기찌개 둘이지만 얼굴을 슥 보는 것으로 뭘 먹을지 안다. 혼자 먹는 밥이 불편할까 요즘 사는 얘기를 물으며 분위기를 맞춰준다. 오랜 시간 사소함을 이야기하고 정분을 나누었던 덕분이다.
돌아보면 한 번도 배고파 찾아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 "아들 친구들이며 딸 친구들이며 내 밥 한 번 안 먹어 본 애들이 없어. 저 혼자서도 불쑥 들어와 '어머니 밥줍써'하거든. 그래야 뭔가 먹은 것 같다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 그때 까까머리 아이들이 이제는 자기를 꼭 닮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고객관계.Relation)'
김 대표는 "오전에 혼자 장사 준비를 하다보면 이제는 힘이 들어. 아들이 이렇게 도와준다니까 하는 거지. 이제 슬슬 가게를 맡겨야지"했다. 레시피는 아직 김 대표의 머릿속에 있다. 조리법을 정리한다고 해도 40년 손맛이며 사람관리는 다 어떻게 할까. "한꺼번에는 안 되지. 억지로도 안돼. 몸이며 마음이 다 '내 일이다' 생각해야 되는 거야. 나도 어머니한테 그렇게 배웠거든. 가족이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라. 남 속이지 마라. 이렇게 하면 찬찬히 배워지지 않을까". (명확한 목표 설정.Target) (기본에의 충실.Ground) 고 미 기자
고 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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