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8. 남도리곶

▲ 대틈곶으로 불리고 있는 '남도리곶'은 숲에 들어간 소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찾지 못할 정도로 우거졌었지만 지금은 송전용 철탑 설치로 길이 났다. 사진은 남도리곶으로 들어가는 입구. 특별취재팀
가장 큰 마을서 지명 유래 추정
수산리 주민들 대틈곶으로 인식
공유화재단 38만여㎡ 매입 보존
 
곶자왈은 마을 주민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며 존재해 왔다. 시대에 따라 효용가치가 변해왔고, 주민들의 곶자왈에 대한 인식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나 다름없는 생활유적들이 일부 확인되거나 사라져 입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수산리 일대의 오름 군에 둘러싸인 남도리곶도 제주4·3 이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서 선조들의 삶을 오롯이 품었다. 
 
△편찬 과정서 지명 달리 표기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전개되는 곶자왈인 남도리곶은 고문헌이나 고지도의 편찬 과정에서 지명의 한자어를 달리 표기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대교수(한도리곶)로 표기됐지만 123년이나 늦게 제작된 「탐라지」를 비롯해 여러 고문헌에는 목교수(남도리곶)로 바뀌어 나타난다.

1700년대에 편찬된 고지도인 「조선강역총도 중 제주」 , 「고지도첩 중 탐라전도」에도 대교수로 표기돼 있다.

이러한 사실이 후대에 지명을 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 표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지명의 지리적 정보에 대한 오류를 바로 잡은 것인지는 추가적인 규명 작업이 필요하다.

오늘날 수산곶자왈은 수산2리 지역 주민들에게는 '대틈곶'으로 불리고 있다. 

옛 지명인 남도리곶(목교수)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과거에는 곶자왈 주변에 지금은 밭으로 개간돼 대나무 군락만 남아있는 동박낭가름, 남도리가름, 황무술가름으로 불린 자연마을이 형성돼 이 지역 주민들이 곶자왈을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마을규모가 가장 큰 남도리(가름)를 숲 지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곶자왈 주변의 지명은 삼쟁이굴, 흘동산, 유지남모루, 삭다리거, 광다리터, 훈망, 섯곽굴미 등 여러 지구로 나뉘어 불리고 있다.

곶자왈공유화재단은 23억여원을 들여 2013년부터 2014년까지 2차례에 걸쳐 대틈곶 내 38만8853㎡(11만7628평)를 매입해 보존하고 있다.
 
△망·보건·목 등 꿩사냥 활발

사냥과 채집의 무대였던 대틈곶은 옛 수산리 주민들에게 '식량창고'와 다름없었다.

꿩과 노루, 오소리 등은 대틈곶 주변 중산간 마을 주민들의 겨울나기에 큰 도움이 됐으며, 다래와 머루, 으름, 꾸지뽕나무 열매 등도 귀중한 먹을거리였다.

특히 지난 1980년대까지 이어진 꿩 사냥은 오름 군에 둘러싸인 대틈곶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옛 수산리 주민들은 농한기부터 이듬해 봄까지 대틈곶 곳곳에서 20~30명씩 무리지어 꿩을 사냥했다.

▲ 몽고말을 키우기 위한 방책시설인 잣성.
사냥조의 조장 격인 '패장'의 지휘 아래 망보는 사람을 뜻하는 '망하니'들은 언덕에 올라 꿩의 움직임을 살폈다.

'보건'과 '훗망'이 숲 속을 해치며 꿩을 날리면 망하니가 "개오라"고 소리쳤으며, 사냥개들이 잡아온 꿩을 수거하는 일은 '목'이 담당했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틈곶은 대규모 목장이었다.

'수산평'이라 불린 드넓은 초지에서 몽고말을 사육했으며, 4·3당시 와해된 동박낭가름, 남도리가름, 황무술가름은 유목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말을 가둬놓기 위해 대틈곶을 가로질러 겹담으로 견고히 쌓은 '잣성' 일부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또 4·3 당시 마을 주민들은 대틈곶 내 삼쟁이굴에 세워진 경찰주둔소에 닥나무로 땔감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일회용 숯가마로 숯을 굽기도 했지만 현재는 대형 양돈장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마을 주민 양명보씨(85·수산2리)는 "대틈곶에서 보리와 조, 피, 콩 등을 재배했으며 팽나무, 닥나무, 참나무, 종가시나무로 숯을 굽기도 했다"며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지만 예전에는 삶의 터전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한 권·사회부 고경호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전문가 기고 / 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성산읍 수산2리 주변에 전개되는 곶자왈은 '대틈곶'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 이름이 어떤 연유로 주민들에게 전해지게 됐는지, 또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수산2리의 옛 이름이 '흘앞(訖前)' 혹은 '곶앞(花前)'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수산2리를 끼고 곶자왈이 펼쳐지고 있었음은 옛 지명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고지도와 고문헌에 등장하는 수산곶자왈은 남도리곶(木橋藪)으로, 정의현 7㎞ 지점에 있다고 기록돼 있을 뿐 옛 지명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지조사를 통해 사라져버린 옛 마을 중 남도리가름(남도리마을)이 있었음을 확인한 사실이다. 물론 현재 남도리가름의 주변 지구는 모두 밭으로 개간되거나 초지 또는 가시덤불 등의 관목류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수산곶자왈은 마을을 다소 벗어난 지점에서 나시리-좌보미-동검은이-손자봉-용눈이오름을 잇는 주변부가 중심부로 남아 있다.

마을 주변부의 곶자왈에는 오랫동안 방목을 해온 탓에 키 작은 가시덤불이 뒤덮고 있고 오름 주변으로 들어갈수록 종가시나무와 팽나무 등 교목류가 자리 잡으며 숲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수산곶자왈에도 어느 샌가 송전용 철탑과 풍력발전기가 들어서며 곶자왈의 강렬한 색채를 지워가고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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