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곶자왈의 '고유 이름'을 찾아서] 에필로그

곶자왈에 분포하고 있는 다양한 생활유적들은 옛 제주사람들의 '생활사'를 유추할 수 있는 열쇠다. 사진은 '머들곶'으로 불리는 애월곶자왈 내 대규모 돌담으로 돌무더기인 머들이 이어지며 자연스레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별취재팀

전통 방식부터 제주4·3 흔적까지 '생활사' 파악 중요 단서
학술조사 및 연구 부족·일부 유적 훼손 등 보전 방안 미흡
고문헌·지도 표기 실제 지명과 차이…'채록 작업' 등 시급


'제주의 허파'이자 '생명의 원천'인 곶자왈은 그 자연적 가치만으로도 보전 이유가 충분하다. 제민일보는 2002년~2007년 '곶자왈 대탐사', 2014년~2015년 '제주 생명숲 곶자왈 연대기'를 통해 '환경 자산'으로서의 곶자왈의 보전 가치를 도내·외에 각인시켰다. 반면 옛 제주인들의 삶이 투영된 곶자왈 내 생활유적에 대한 발굴·연구는 상대적으로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고문헌·고지도에 명시된 옛 지명을 토대로 곶자왈의 옛 이름을 찾고 다양한 생활유적들을 발굴·조사하는 일은 결국 곶자왈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림으로서 개발의 광풍을 면치 못하고 있는 곶자왈의 보전 필요성을 더욱 공공히하는 초석이 됐다.

△기록·구전 '연결고리' 찾아야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탐라지」(1653) 등 고문헌과 「탐라순력도 한라장촉」(1702), 「탐라지도병서」(1709) 등 고지도를 통해 확인된 곶자왈의 위치와 옛 지명들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다.

하지만 시대를 달리하면서 편찬된 고문헌·고지도에는 일부 곶자왈 지명의 한자어를 달리 표기하고 있어 후대에 지명을 전사하는 과정에서 바뀌었는지는 추가 규명이 필요하다.

또한 곶자왈의 옛 지명의 유래를 유추하는 작업이 어려운데다 주민들을 통해 구전돼온 지명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 마을 고령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옛 이름과 곶자왈 생활사를 기록화 하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

실제 김녕곶의 경우 역사가 오래되고 마을규모가 큰 김녕을 숲 지명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서림곶은 서림수라는 한자 표기에서 제주 서부지역의 숲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주민들에게 '대틈곶'으로 불리는 수산곶자왈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강역총도 중 제주」, 「고지도첩 중 탐라전도」에는 대교수(한도리곶), 「탐라지」를 비롯한 여러 고문헌에는 '목교수'(남도리곶)로 달리 표시돼 있다. 

이처럼 옛 기록과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곶자왈 지명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일은 과제로 남아있다.
 

 선흘곶에서 발견된 곰숯가마로 입구와 정면 상단부가 허물어진데다 상부에 10여그루의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붕괴 우려가 크다. 특별취재팀

△향토적 특성 뚜렷

곶자왈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발굴된 다양한 생활유적들은 옛 제주사람들의 '생활사'를 유추할 수 있는 열쇠다.

조천·함덕 곶자왈의 일부이자 고문헌과 고지도에 '김녕곶'으로 표기된 선흘곶자왈에서는 돌숯가마(일명 곰숯가마) 2기를 비롯해 숯을 굽고 허무는 폐기형 숯가마인 1회용 숯가마 터가 다수 발견되는 등 마을의 향토성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특히 야생 노루 사냥과 함께 동물들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석축함정인 '노루텅'은 선흘곶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생활유적이다.

애월곶자왈의 일부인 '머들곶'은 제주 4·3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머들곶의 입구였던 '원동마을'은 제주 4·3 당시 소길리 원동과 상가리 원동으로 나뉘어 부락을 이루고 있었지만 지난 1948년 11월13일 토벌대에 의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지금도 머들곶 안에는 1.4~1.5m 높이의 겹담으로 축조된 '숯막'이 원형 그대로 보존, 4·3 당시 토벌대를 피해 곶자왈로 숨어들었던 주민들의 은신처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 돌무더기인 머들이 이어지며 자연스레 형성된 돌담들이 다수 발견됐으며, 대규모 집터와 경작터도 확인되는 등 머들곶이 원동마을을 비롯한 주변 마을 주민들의 생활 무대였음을 짐작케 했다.

지금의 무릉곶자왈인 '서림수'에서는 맷돌과 연자방아용 돌을 채취하던 '고래모들', 삼을 재배하던 '삼가른구석' 등이 흔적으로 남아있으며, 약 100여년 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돔 형태의 돌숯가마와 숯제조장, 숯막이 모여 있는 '숯 세트장' 등 다양한 생활유적들이 확인됐다.

또 '대틈곶'으로 불린 수산곶자왈에서는 몽고말을 키우기 위해 대틈곶을 가로질러 겹담으로 견고히 쌓은 '잣성'이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채 유적으로 남아있다.
 

곶자왈이 표기된 고지도인 「탐라지도병서」.

△채록 등 지속 관심 필요

곶자왈의 역사·문화 유적과 마을 주민들을 통해 채록한 '생활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추가 조사 등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발굴된 유적 모두 공공자산으로서 가치가 크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보존 방안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실제 선흘곶에서 발견된 곰숯가마 2기 중 1기는 입구부와 정면 상단부가 허물어진데다 상부에 10여그루의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붕괴 우려가 크다.

또 머들곶에 대한 역사문화자원 학술조사나 연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어 이번 답사에서 원동마을 생존자와 이웃마을 주민들의 증언으로 4·3 당시 은신처와 집터, 경작터 등 일부가 확인됐을 뿐 실제 얼마나 많은 생활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대부분 개발돼 일부 흔적만 남아있는 우진곶은 가시낭모루, 식산, 독머흘 등 다양한 지구로 나뉘어 불렸지만 후대에는 매우 생소한 지명으로 전락한 채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틈곶 역시 4·3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채 현재는 송전용 철탑과 풍력발전기가 들어서는 등 원시림 특유의 강렬함이 희미해지고 있다.

특히 고문헌과 고지도를 토대로 한 옛 지명 찾기와 곶자왈의 역사·문화유적 발굴에서 더 나아가 현재 마을을 끼고 분포하고 있는 모든 곶자왈에 대한 연구조사가 뒤따라야 함은 틀림없다.

곶자왈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있는 만큼 곶자왈의 '채록 작업'은 서둘러 이뤄져야 한다.

<특별취재팀= 경제부 한 권·사회부 고경호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백종진 제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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