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프롤로그
제민일보가 지난 2002년부터 진행해온 '곶자왈' 탐사는 생태적 가치에서 시작해 역사와 호흡해온 삶터를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다. 곶자왈은 각종 개발 움직임에 있어 끝까지 지켜야할 허파의 역할과 더불어 자연과 공생해온 선조들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반드시 보존해야할 '제주의 보물'로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생태 조사와 더불어 역사·문화적 가치를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무한한 잠재 자원은 물론 곶자왈에 녹아 든 옛 선인들의 삶을 기록으로 옮기고 관심을 모아야 할 때다.

△동·서부 4대 권역 분포
곶자왈은 송시태 박사의 '암괴상 아아용암류 분포도'에 따라 동·서부지역 4대 지대로 대분된다.
동부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조천·함덕 곶자왈지대는 '동백동산'으로 불리는 선흘곶자왈을 비롯해 조천·대흘곶자왈, 함덕·와산곶자왈로 이뤄져 있으며, 구좌·성산 곶자왈지대는 종달·한동, 세화, 상도·하도, 수산곶자왈을 포함한다.
또 서부지역의 애월곶자왈지대는 납읍·원동곶자왈, 한경·안덕 곶자왈지대는 월림·신평, 상창·화순곶자왈을 품는 등 동·서부 4대 지대에는 모두 10개의 곶자왈 용암류가 분포하고 있다.
이처럼 곶자왈은 수많은 중산간 마을에 둘러싸여 농경·사냥·채집 등 지역 주민들의 경제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쳐왔다. 지금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농사와 목축이 이뤄지는 등 '곶자왈 생활사'는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생활자원의 산실
옛 제주사람들에게 곶자왈은 생활 자원의 산실이었다.
초가집은 물론 농기구, 테우 등에 쓸 아름드리나무를 구했으며, 해안 마을 사람들과 물물 교환에 사용할 숯과 장작도 곶자왈에서 조달했다.
선흘곶자왈과 무릉곶자왈 등에서는 지금도 대형 '숯가마'와 숯을 구우며 휴식을 취했던 '숯막' 등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제주사람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은 곶자왈의 척박한 땅을 조·보리 등 밭작물을 재배하는 경작지로 바꿔놓았다.
또 고사리 등 산나물과 칡·오미자·더덕·마 등 약용 작물은 물론 종가시나무 열매 등을 채집하는 등 먹을거리가 부족한 당시 식량 창고로 이용됐다.
겨울나기를 위한 사냥 역시 곶자왈 생활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흘곶자왈에서는 석축 함정인 '노루텅'을 설치해 야생 노루를 잡았으며, 수산곶자왈에서는 오름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특징을 이용한 꿩 사냥이 활발히 이뤄졌다.

△곶자왈의 변모
곶자왈 개발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276년(고려 충렬왕 2년) 몽골이 말 160필을 가져와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곶자왈에 동아막 등 목마장을 조성했으며, 몽고마를 키웠던 유목민들의 마을도 형성됐다.
또 여몽연합군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 당시 선흘곶자왈에 서식하는 나무를 베어다 전투에 투입될 배를 건조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곶자왈은 '국마장'으로서 활용됐다. 무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데다 다양한 식물들이 서식하는 곶자왈은 말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서 개발될 수밖에 없었다.
곶자왈에 닥친 대규모 개발은 일제강점기때 본격화됐다.
당시 일본은 임산자원의 침탈을 위해 한라산 중턱을 잇는 '하치마키'(산록도로)를 조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곶자왈 지대의 대대적인 벌목이 이뤄졌다.
1960년대 이후 삼림보호 정책과 생활경제 변화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며 다시 숲을 이뤄가던 곶자왈은 현재 골프장과 주택단지가 들어서며 훼손되는 등 개발의 그림자로 신음하고 있다.
구전으로 남아있는 곶자왈의 이용 실태와 주민들의 곶자왈에 대한 인식 조사는 곶자왈의 체계적 보존 관리를 위한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한 권·고경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