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느냐고 묻거든, 웃지요”라 끝맺는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모습 그대로 생활을 하는 부부가 있다. 고난실·현장식씨 부부가 그렇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했던가.

 그들이 30년이 넘게 했던 일이 바로 남의 빈 마음을 채워주고 허실한 몸을 일으켜줬던 ‘타인에게 창을 낸’ 바로 그 일이었다. 그런 후에 비로소 스치는 미소.

 식지 않은 땀방울이 시냇물처럼 흘러 타인의 가슴에 흘러들 때까지 비록 거친 손일지라도 기꺼이 남을 위해 바치는 사람, 갑자기 봉사란 낱말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그것은 봉사이기 이전에 적어도 어려운 이웃과 함께 어려워하면서도 나누고 떼어주고 아파하는 이들 앞에서는 말이다.

#종교인들 치고 효자 없더라

 “종교인들 치고 효도하는 놈 하나 없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고난실씨(50)의 모친은 16살 꽃다운 고씨에게 집채만한 가난을 부려두고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9살부터 이미 집안 일을, 밭일을 거들었던 그녀는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보리 묶고 채소 걷으면서도 교회 다니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겐 유일한 꿈이 있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한글이라도 마치자”

 교회에서 배웠던 한글 책을 뒤적이는 순간은 달디단 휴식이었으나 늘 그녀 앞에 펼쳐진 집안 일은 그녀의 휴식마저 뭉개놓기 일쑤였다.

 현장식씨(52)의 삶도 그닥 다르지 않았다. 장남으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도맡았던 그는 독실한 교회신자였지만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하는 것인지 그에게는 참으로 고단한 것이었다.

 그를 죽음 직전까지 가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밥 세끼 내내 상위엔 국수였어요. 월급날에도 어머니는 아껴야 잘 산다하시면서 고깃국 한번 해먹으려 하지 않으셨지요”

 얼마나 속상했던지 하루는 여지없이 국수 상을 들고 들어오는 모친의 상을 받자마자 냅다 마당에 패대기치고 집을 뛰쳐나갔다.

 월급날인데도 그 기분 한번 맞춰주지 못하는 어머니. 검소한 삶이 아예 몸에 배어버린 모친. 그 삶에서 현씨는 도망만 치고 싶었다. 

#돈 한 푼의 무게

 왜 그들은 그렇게 봉사하는 삶을 선택한 것일까. 누가 하라 떠밀지도 않았잖은가.

 “18세 때였어요.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의 말씀이 제 인생의 지표가 됐지요” 청년들이 담배 한 갑, 술 한잔 마시는 거 아껴 땅 한 평이라도 사서 땀흘려 가꾸는 것이 바로 올바른 삶임을, 그리고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강조했던 김 장로의 말을 잊지 않고 지켜갔다. 

 현씨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깨달은 것도 “이렇게 내가 어리석었나. 어머니의 그 깊은 뜻도 모르고. 젊은 나이에 이렇게 죽으면 바로 지옥행 아닌가”하는 것이었고 “부모말씀에 순종하자”“이웃을 위해 살자”였다.

 그런 그들이 우연히 중매로 만나 결혼에 골인할 때 그들의 "남을 향한 사랑"은 비로소 불꽃을 피웠다.

 70년 초 동문로에서 양화점을 하며 한 푼 두 푼 돈을 모았다.

 그리하여 부부가 첫 문을 두드린 곳이 바로 모자원이었다. 털신 80켤레, 그것이 시작이었다.

#국 한 그릇에도 따뜻한 온기 담아

 그들의 30년 간의 봉사생활이란 어떤 모습이었던가.

 그들은 그 동안 보건소 간병도우미로, 영락교회의 호스피스 봉사단체인 ‘제주호스피스’단원으로 활동해왔다.

 그들이 만났던 사람은 불우청소년·장애인·독거노인·보육원·모자원·질병말기 환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 숱한 인연들은 가난이 죄인 것처럼 살았던 고씨 부부에게 동병상련을 넘어 몸에 이미 들어와 차버린, 살아갈 의미였고 목적이었다.

 고씨 집에서 묵었던 신부전증환자와 손녀, 유일한 혈육이던 할머니를 병으로 잃은 청년.

 용변을 받는 것에서 환자의 장례식이 있는 그 날까지 고씨부부는 그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왜 봉사활동을 하느냐고? 고난실씨는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이더군요. 아무리 돈이 많으면 뭐하냐며 어떤 사람이 말하더군요. 남을 돌보는 것은 바로 정을 나누고 받는 것이랍니다”

 “봉사? 당신 가족이나 잘 챙기쇼”라고 비웃던 몇몇 사람들. 심지어 “내 재산 떼어갈려는 수작”이라며 곁에 얼씬도 못하게 했던 사람.

 고씨 부부는 결국 사람들은 정의 부재, 사람으로 살기에 가장 중요한 정을 나누지 못하는 설움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을 의심하고 꺼려하며 배척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는 더욱 정성을 다해 다가갔고 만났고 자신들의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거기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만남은 그저 돈 몇 푼 쥐어주며 도취됐던 호의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때론 홀로 사는 노인이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 임종을 앞둔 환자들, 그들의 남은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를 했다.

 고씨 부부는 “아무런 간호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암 말기 환자들이 주변에는 많아요. 그런 환자들을 위해서 도내에도 그들의 간병을 위해 호스피스센터가 필요하지요”라고 했다. 이를 위해 고씨 부부는 자신들이 가꾸었던 과수원에 1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땅을 센터 설립하는데 내놓았다. ‘제주호스피스’가 추진 중에 있는 이 센터는 내년 설립 예정에 있다.

 퍼온 김치 한 통에도 정성이 다르듯이 독거노인에게 가져간다며 냄비에 담는 국 한 그릇이 달랐다. 가족이란 걸 느끼기에 충분한 포만감이 그 속에서 김을 펴 올리고 있었다.<글=현순실·사진=김영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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