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제주잠녀' 7부 문화융성의 핵심으로 8. 제주사(史)적 가치 복원<2>

불턱에서 잠시 쉬면서도 모닥불을 등지고 성게를 까고 있는 잠녀들. 현을생 기획전 '제주의 여인들' 도록 발췌.

물질로 번 현금 지역경제 흘러드는 첫 원천 역할
자생력·지속가능성 바탕 환경 변화 적극적 수용
중산간→해안마을, 환금작물 재배 확산 등 영향

'제주잠녀'라는 이름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역사적 위치는 물론이고 제주 사회·경제에 있어 제주잠녀는 남성이나 여성의 구분을 넘어 하나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1900년대 중반까지 잠녀의 노동력은 제주의 대표적 현금수입원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공덕비'가 저절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몇 몇 학자들은 이를 통해 '마을 이동'까지 이뤄졌다고 본다. 이 것들도 모두 '문화'다.

일제강점기 현금소득원 부상
일제강점기 일본이 '제주 잠녀'에 대한 조사에 열을 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이 시기 제주지역 경제는 잠녀들의 노동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 이전에도 잠녀들이 물질을 통해 가계를 꾸렸지만 '제주'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특별한 주목을 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잠녀들이 채취한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했고, 제주 연안 황폐화로 출가 물질이 확산됐으며, 어로 기술이 발달했던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가 된다. 이는 제주 사회 발전상과도 맞물린다.

해산물 가격이 오른 배경에는 부산에 거점을 둔 일본인 상인의 등장이 있다. 자가소비나 제수용, 그 외에는 도내, 그것도 시장내 '거래'에 우선했던 상황은 '수출'이란 창구의 등장으로 급변했다. 전복과 해삼, 미역, 우뭇가사리, 모자반등 주요 식재료였던 것들이 '상품'이 되면서 잠녀들의 역할까지 달라졌다. '산업 역군'이 된 것도 이 시기부터다.

일본 잠수기업자의 진출로 물질이 힘들어진 잠녀들이 제주 밖으로 일을 찾아 자리를 옮겼고 이는 '생산영역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제주잠녀문화 중 하나인 '생업 기술의 전파'와 이를 통한 '문화 형성'이란 공식이 성립된다.

물질하는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들. 구좌읍. 1988년. 강만보 사진집 「영 허멍 살아 왔수다」 발췌.

생업기술 전파, 신기술 도입 창구
또 하나 '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상황 역시 제주잠녀문화의 한 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생력'과 '지속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중 하나가 '눈'이다. 눈을 언제부터 착용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확실치 않다. 

'눈'이라 부르는 물안경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소형 알이 두개로 분리된 '쌍눈' 등 소형 쌍안경수중안경이었고, 1960년대 이후는 분리되지 않은 외눈이 사용됐다. 쌍눈을 '족은눈' 또는 '족쇄눈'이라 하고, 외눈을 '큰눈' 또는 '왕눈'이라고 불렀다. 또한 '큰눈'은 그 테두리의 재료를 처음에는 황동판으로 만들어 썼지만 1970년대 고무옷이 보급되면서 부터는 고무를 활용한 '고무눈'이 보편화됐다. 

이전 기록들에서 잠녀들이 "내가 어렸을 때는 눈을 쓰지 않고 조업했다"는 내용에서 유추해 볼 때 우리나라, 제주에 눈이 도입된 것은 1900년대 이후로 설명할 수 있다.

경제 주도권 전환 등 변화 중심
잠녀가 바꾼 것은 제주 경제 전체였다.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의 「통사로 보는 제주 해녀」 등에 따르면 잠녀들의 노동으로 인한 제주 지역 농촌 경제력의 상승은 주재배 작목을 바꿨고 해안지역의 부(富) 상승에 따른 취락의 이동으로 이어졌다. 

경제적 기회의 증가는 도내 여유 노동력을 만들었고 교통발달에 힘입어 소득 증대와 이로 인한 경제 활성화가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사실 이 시기 현금 소득이 지역 농가 소득에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경제적 주도권이 중산간 마을에서 해안 마을로 옮겨갔고 환금작물 재배가 확산된 것도 이 시기다.

마을의 공공적인 일에 있어 '의사 결정권'을 가지게 된 것 역시 이런 배경이 있어 가능했다. 제주도의 「제주의 해녀」(1996)에서도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에도 해녀회의 공금은 큰 몫을 맡는다"는 그 역할을 인정했다. 

주요 마을지나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2011) 같은 기록물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0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일제강점기 추자도 부속섬 '사수도'물질이 시작됐고 이후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최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섬을 사서 관리했다. 물질 수입의 일부를 학교 발전기금으로 낸다는 내용의 약속은 이후 1967년 추자교운영위원회가 제주 세무서에 7만3500원을 주고 매입 등기를 했고 입찰을 통해 작업권을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대서리와 영흥리 잠녀들이 2년에 1번 돈을 모아 섬에서 작업하는 권리를 산다.

1970년 초등학교 육성회비 폐지 전까지 유지됐던 우도 '기성회바당'은 현재 그 재원을 마을공동사업에 투자하는 것으로 쓰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남아있다.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 합니다. 

울발연 「…울산해녀 이야기」
국립민속박물관 조사도 진행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사라져가는 것들의 소중함은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제주잠녀문화'도 비슷하다. 제주잠녀들이 고령화 등으로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소리를 내면서도 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환경 변화에 따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수년째 제자리 걸음중이다. 이런 가운데 타 지역의 움직임이 상대적으로 빨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가 울산 해안에서 활동하는 해녀 12명의 인생사를 정리한 연구과제물 「바다와 더불어 살아온 인생-울산 해녀 이야기」를 펴냈다. 제주 해녀 2명과 '울산 해녀' 10명의 이야기다.

이외에도 울산학총서에서 '울산 여성 어업인(해녀)들의 변천사'도 짚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2005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해마다 광역지자체를 하나씩 정해 진행하고 있는 민속조사의 일환으로 올해는 울산 북구에 있는 어촌인 제전마을과 농촌인 달곡마을을 살피고 있다. 여기에도 '해녀'가 등장한다.

울산학연구센터는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나라 해녀들의 생애사를 울산지역에서도 집중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이같은 작업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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