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기획 '제주잠녀' 7부 문화융성의 핵심으로 에필로그

11년 대장정 마무리…가치 재평가 이끌어
박물관·조례 선도…해녀 삶 채록 자료화
유네스코 등재 신청에 핵심적 역할 수행
해녀문화 관리·활용 방안 주도 '새 도전'
한참 도내 어촌계를 돌며 잠녀들의 얘기를 수집하던 때였다. 2007년 2월 잠녀기획팀이 남긴 메모에는 '잠녀는 나이를 먹고, 바다는 생명력을 잃고'라고 적혀있다. 그 사정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달라진 것은 '제주잠녀'에 대한 사회적 잣대다. 여전히 억척스러움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지닌 정체성을 지켜야한다는데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제주를 이야기하면서 제주잠녀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햇수로 11년의 대장정은 분명 '의미'있었다.
'생존' '생업'에서 출발
2005년 6월 2일 잠녀기획의 처음은 '어머니'로 시작됐다. 물질을 하는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통용된 '해녀'가 아닌 '잠녀'로 통일해 부른다고 의미 부여를 했다. 뭍으로 찾아갈 수 있는 가장 끝인 '강원 고성군 거진리'를 시작점을 삼은 것 역시 비슷한 의미였다. 왜 물질을 했는지, 왜 뭍으로 향했는지, 그들에게 '생존'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물었다.
2006년에는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하는 이유를 화두로 던졌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생업을 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부터 잠녀 공동체의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접근이 이뤄졌다. '전시성' 문화유산 지정의 함정과 제주사 정립과 연계한 잠녀의 사회적 지위 재고 주문도 나왔다.
이후 제민일보의 잠녀기획은 이들 화두를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2006년 7월 시작된 '발로 딛는 잠녀들의 삶'은 도내 100개 어촌계를 중심으로 지역 잠녀들의 현황과 작업환경, 변화상 등을 살피는 등 지역별 비교분석을 위한 여정이었다. '4·3은 말한다'로 우리나라 데이터 저널리즘의 첫 페이지를 썼던 저력이 잠녀에도 고스란히 이어진 셈이다. 고령으로 깊은 바다에 들지 못하는 대신 관광객을 상대로 새로운 소득을 창출한 '안덕면 사계리'에서 출발한 걸음은 돌고 돌아 2008년 12월 구좌읍 월정리에서 끝났다.
그 과정에서 해안도로가 나고 경치 좋은 바닷가에 하나 둘 관광시설이 들어서면서, 하수종말처리장이나 화력발전소, 양식장 같은 인프라가 확충되면서, 피하기 힘든 기후변화나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하나 둘 바다를 떠나는 잠녀들 만났다. 당시 '물질 3대'로 지면에 소개됐던 김재연씨는 몇 안 되는 도내 40대 잠녀로 아직 마라도를 지키고 있다.
기억을 기록으로
'톳짐을 못질 정도면 알아서 포기했다'(북촌)는 말처럼 잠녀들이 스스로 바다를 떠나는 사정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라는 큰 목표 외에 그들의 기억을 하나라도 더 기록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졌다.
2009년 3부 '잠녀를 만나다'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촌계 작업도 쉽지 않았지만 산업화·도시화 등을 거치며 홀대를 받고 편견에 시달렸던 트라우마는 잠녀들이 기억을 더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1950년대 이후 독도 물질을 했던 잠녀들을 찾아내 '실효지배적 의의'를 부여하고 일본과 중국까지 건너가 바다에 몸을 던지면서도 제주에서의 기억을 붙들었던 잠녀들을 찾아 기록한 것은 큰 성과로 꼽힌다.
이후 제4부 '제주 잠녀, 지키다'를 통해 제주해녀박물관과 잠녀와 관련한 연구서와 연구자 등의 흔적을 훑었고, 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를 통해 콘텐츠 등 문화유산으로서 활용 가치를 점검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제주해녀문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한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 등재 대상 신청종목으로 채택된 것에 맞춰 유산화 작업의 토대가 될 '제주해녀목록'(제6부)도 작성했다.
차별화한 정책 유도
이들 작업은 잠녀문화 정책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여타 기획과 차별화된다. 1600년대 '잠녀'라 칭했던 자료를 찾아내는 등 일련의 작업은 현장에서 진행됐다.
변변한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고문서를 뒤지거나 관련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의 기억을 채록했다. "잠녀 하나가 목숨을 잃으면 박물관 하나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상황을 세상에 들춰낸 것도 제민일보였다. 일련의 과정은 지역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연결된다.
잠녀 기획이 시작된 지 꼬박 1년 만인 2006년 6월 '제주해녀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2009년 11월 '해녀문화 보존 및 지원 조례'가 제정됐고, 2011년에는 '제주해녀문화 세계화 5개년 계획'이 수립됐다. 해녀문화보존 및 전승위원회의 탄생도 지켜봤다.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회가 '대한민국무형문화유산국가목록'에 '잠녀'를 포함시키고 유네스코 본부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까지 일련의 흐름 앞에 잠녀공동체를 중심으로 제주가 먼저 준비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제주 잠녀가 물질 기술 외에도 민속지식을 통해 이어져온 '살아있는 문화유산(Living Heritage)'이자 나눔과 배려의 공동체성이라는 제주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사회적 함의를 이끌었다는 사실 역시 간과하기 어렵다.

유네스코 등재 효과 극대화 주문
10여년의 작업에 일단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럼에도 아직 부족하다'는 요구를 반영한 결과다.
제민일보 잠녀기획이 진행되면서 가장 많이 들어야 했던 질문과도 연결된다. 제민일보가 나서 해녀와 잠수, 잠수어업인 등으로 혼용하고 있는 용어의 정리를 주문했고, 행정상 '해녀'로 통용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정작 고집스럽게 '잠녀'라 지칭하는 것이 자칫 혼선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에 공감한다. '제주해녀문화'라는 이름을 보다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오랜 동안 촘촘하게 관련 내용을 살펴온 작업들을 정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하 기획의 마무리는 '출발'의 다른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제주잠녀에 대한 인식은 바뀌었다. 신문 지면과 여러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기록화'작업도 이뤄졌다.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 등과 공동으로 <제주해녀문화의 이해> <통사로 읽는 제주해녀> <제주해녀의 고리를 연결하다> 등의 자료집 및 보고서를 만들어 고 강대원의 <해녀연구>(1970)·<제주잠수권익투쟁사>(2001), 고 김영돈의 <제주의 해녀>(1996)·<한국의 해녀>(1999) 등의 맥을 이었다.
일본 아마와 분명한 구분과 광복 70년을 아우르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제주잠녀'의 위치를 분명히 알렸으니 적어도 10년의 소임은 다했다. 앞으로 작업은 '해녀'라는 공통분모에 맞춰 진행된다. 그동안 작업으로 이끌어낸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충분하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무형문화유산'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또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 역시 제민일보가 만들 것이다.<끝>
※ 이 기획은 ㈔세계문화유산보존사업회와 함께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