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4. 산양곶자왈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노랑굴'은 곶자왈 중 유일하게 산양곶자왈에서만 발견된 대형 옹기가마로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 옛 마을 주민들은 노랑굴에서 허벅·항아리·병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들을 구웠다. 현재도 가마 주변과 인근 과수원의 지표면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옹기 파편들이 묻혀있다. 특별취재팀

대형 옹기가마 노랑굴 유일 발견 보존 가치 커
생계유지 위해 '숯' 구워다 모슬포장에서 팔아
탐방로 인근에 임시거처용 동굴 유적 2기 위치
암반지대 뿌리내린 상록활엽수림 생명력 뿜어

제주도 서부지역에 광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산양곶자왈은 이웃하고 있는 저지·청수·무릉곶자왈과는 다른 특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투박한 암반지대 위에 뿌리내린 상록활엽수림은 대자연의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으며, 다른 곶자왈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대형 옹기가마도 품고 있다. 장작과 숯을 내어주던 곳이자 소마를 방목할 수 있는 목장이었던 산양곶자왈은 옛 마을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보물'이었다. 

도자기 등 유물 발견

곶자왈내 수많은 동굴 유적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임을 달리해왔다. 선사시대에는 주거 공간으로 활용됐으며, 제주4·3 때는 주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했다. 이후에는 소마를 방목하거나 숯을 굽는 주민들이 비를 피하거나 잠시 쉴 수 있는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재 산양곶자왈에서는 모두 2기의 동굴유적이 발견됐다.

산양곶자왈 탐방로 인근에 위치한 '무명1굴'은 통로가 좁고 낮게 형성돼 정확한 규모를 확인할 수 없다. 동굴 입구는 높이 64㎝·폭 84㎝ 규모의 원형이며, 내부는 반원형의 터널 형태다. 입구 좌·우에 옹기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어 옛 주민들의 임시거처로 추정되고 있다.

무명1굴 동쪽 도보로 10분정도 거리에는 '무명2굴'이 위치하고 있다.

길이 205㎝·높이 85~97㎝ 규모로 동서방향으로 길게 이어지는 터널형의 용암동굴이며, 입구에서 400㎝ 거리의 채광범위 안에서 적갈색경질토기·도자기·옹기편 등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또 전복과 고둥류 등의 패류도 발견돼 무명1굴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의 임시 거처로 활용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감 감시 피해 숯 제조

산양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숯 제조는 1949년부터 한 두해 정도로, 당시 숯을 구웠던 가구는 5~6가구에 불과했고, 농한기인 겨울철에 주로 이뤄졌다.

숯은 산양곶자왈 주변 텃밭이나 인근 청수리에 있는 새신오름에서 구웠는데, 이는 새신오름 근처인 큰넓곶에 숯의 재료로 쓰이는 종가시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양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벌채한 나무를 집까지 운반할 때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로변에서 가까운 곶자왈이나 오름 기슭에 숨겨뒀다가 야간이나 새벽녘에 운반해야 하는 고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때문에 숯 대신에 장작이나 솔잎 등을 팔고 생필품을 구하는 가구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숯가마 크기는 나무 물량에 따라 차이가 났다. 약 1m 정도의 가정용 화로로 사용할 것은 1가마 내외로, 모슬포 장에 나가 팔 경우에는 4~5가마 규모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슬포 장까지 걸어서는 편도 2시간 가량 걸렸다. 숯 7가마면 나무를 10짐 이상 해야 했는데 소 구루마에 실고 갔다. 쌀이 귀할때라 숯을 팔아 번 돈으로 대부분 쌀을 구입했다.

이처럼 숯 생산활동은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이기도 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자녀들의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숯을 구웠다.

산림법이 시행된 후에는 숯을 구우러 갈 때 되도록 주변에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가 숨어서 구웠다. 주변 마을에서 채용된 산감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동네 사람들이 산감을 상점으로 데려가 술을 먹이며 사정하곤 했다.

무명2굴 내부에서 바라본 산양곶자왈.

마을 전체가 매달려

산양리 월광동 '조롱물' 인근에는 '노랑굴'이라고 불리는 옹기가마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시 마을 주민들은 허벅·항아리·병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그릇들을 노랑굴에서 구웠다.

노랑굴은 제주지역 곶자왈 중 유일하게 산양곶자왈에서만 발견된 옹기가마로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

노랑굴은 넓적한 현무암 잡석과 진흙으로 벽과 천장을 쌓고 가마벽 내부에는 흙을 발랐다. 천장이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의 돌과 돌 사이에 잔돌을 끼워 넣었으며, 전체적인 내부 구조는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다.

노랑굴 길이는 12~15m이며, 입구는 높이 160㎝·폭 185㎝로 비교적 넓게 조성됐다. 불을 때는 아궁이와 옹기를 굽는 소성실 사이에는 돌 칸막이가 세워져 있으며, 노랑굴 후면부에는 연기를 외부로 배출하기 위한 배연구 4개가 뚫려있다.

현재도 노랑굴 바닥에는 옹기 파편들과 함께 소성실 벽체에서 떨어져나온 응고된 점토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노랑굴 주변과 인근 과수원의 지표면을 조금만 파내면 수많은 옹기 파편들이 나온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옹기를 굽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됐던 만큼 2~3개조를 꾸려 제작에 나섰으며, 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열기가 높아지는 특성을 이용해 후면부에 큰 옹기를, 전면부에 작은 옹기를 배치해 구웠다.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은 "옹기를 굽기 위해서는 일주일 이상 불을 때는 데 필요한 엄청난 양의 나무와 입자가 작은 점토, 물이 있어야 한다. 또 불 조절과 옹기그릇을 소성실에 배치하는 기술자인 도공도 필요했다"며 "이처럼 마을 주민 전체가 옹기를 굽는데 매달렸던 만큼 노랑굴은 생활유적으로서, 또 곶자왈 내 유일한 옹기가마로서 가치가 크지만 아직까지도 비지정 문화재로 남겨진 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 권 사회부·고경호 경제부 기자 / 자문=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