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6.청수곶자왈 <2>지명 유래와 숯 생산

말 닮은 '마진흘' 등 고유 지명 다양
4·3때 터전 잃고 생계 위해 숯 구워
육군 훈련소 인근 모슬포서 쌀 교환
청수곶자왈에는 마진흘·웃지방턱궤·끅밭 등 옛 주민들에 의해 붙여진 고유지명들이 많다. 지형과 쓰임새에 의해 제주어로 명명된 각기 다른 지명들은 당시 곶자왈을 이용했던 주민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곶자왈 곳곳에서 행했던 숯 굽기도 일부 고령 주민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지명과 숯 제조 과정은 곶자왈의 역사이자 제주 생활사 그 자체인 것이다.
△물 마시는 말 닮은 마진흘
청수곶자왈 입구에 위치해있는 '마진흘'은 목마른 말이 곶자왈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닮았다는데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주민들에 의해 가장 나중에 발견된 물이며, 마진흘에서 물줄기가 끝났다는 의미로 명명됐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마진흘은 천연 봉천수로 수령 500년 이상 된 팽나무 4그루가 현재까지 마진흘을 둘러싼 채 물을 자양분 삼아 자생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른 새벽부터 청수곶자왈에서 풀을 먹던 소들은 오전이 되면 스스로 마진흘로 나와 물을 마셨다고 한다.
갈증을 해소한 소들은 오후 늦게까지 팽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다시 배를 채우러 곶자왈에 들어갔으며, 마을 주민들은 인근 '마진흘동산'에 올라 자기가 키우는 소들이 무사한 지 확인했다.
청수곶자왈 내 '끅밭'은 칡이 많이 자라던 곳이다. 제주어로 칡이 '끅'이며 현재도 굵은 줄기의 칡들이 나무에 엉켜 자라고 있다.
청수목장과 고산목장 경계에 있는 '셋궁돌'은 주변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마을 주민들은 셋궁돌에 세워진 머들 위에 올라가 곶자왈에 방목한 소들을 살폈다.
이외에도 아기구덕 모양의 돌에 고인 물을 뜻하는 '구시물'과 길게 형성된 지형에서 유래된 '진동산', 전복을 엎어놓은 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전복동산' 등 수많은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대부분의 지명들은 목축과 관련된 것으로, 청수곶자왈은 주변 마을 주민들에게 우·마 방목지로써 활발히 이용됐음을 알 수 있다.

△군인·피난민에게 숯 판매
청수리에서는 과거에도 숯을 구워 가정에서 난방용으로 조금씩 사용했으나 1950년대만큼 마을 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숯을 굽지는 않았다.
제주4·3 당시 1948년 10월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먹을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생계용 수단으로 숯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청수리 마을주민들은 마진흘과 곳세왓목, 남둥이밭 등 청수곶자왈 내에서 주로 숯을 구웠다.
한번 숯을 구웠던 자리에서 다시 굽기도 했으며, 보통 숯막은 짓지 않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고 다니면서 곶자왈을 왕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주로 숯을 생산했던 장소인 마진흘에서는 숯 생산 이후에 우마 방목으로 인해 숯가마 터가 훼손되거나 사라진 상태다. 숯 생산은 주로 말숯이나 작대기숯을 구웠으며, 날씨에 따라 2개의 숯가마 방식 중 하나를 택했다. 동료들과 함께 공동 작업으로 숯을 굽기도 했으나 투자한 시간에 비해 숯 생산량이 적어 나중에는 혼자서 숯을 굽는 주민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청수리 주민들은 숯을 구워 한림 오일장을 찾기도 했지만 대부분 모슬포 오일장에서 팔았다.
모슬포에 가서 숯을 팔았던 이유로는 육군 제1훈련소와 피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구에서 창설된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에 모슬포로 이동했는데,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군인과 가족, 피난민들이 생활연료로 숯을 구매했다.
마을 주민들은 숯을 전부 등짐을 지고 모슬포까지 2~3시간 걸어간 뒤 4~5통 가마로 팔았으며, 숯 4통 가마를 팔면 수수쌀 1말을 받았고, 먹보리는 1되를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기고 / 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현재까지 청수곶자왈에서 확인된 역사문화유적은 크게 숯 생산유적, 임시주거 유적, 농경목축 유적, 음용수 유적, 목축 유적, 신앙민속 유적 등이다.
청수곶자왈에서 발견된 돌숯가마는 일제강점기 이전 혹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운영됐고 전문적인 숯제작자를 통해 고급숯을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시 거주유적은 2000년전 탐라시대에 사용된 동굴주거 유적과 농경·목축관련 움막 및 숯 생산 관련 숯막으로 나뉜다.
청수곶자왈 내 동굴주거유적은 웃지방턱궤가 있으며, 청수곶자왈 인근 구억곶자왈에서 확인된 수혈식 석벽움막은 지상식 움집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또 청수곶자왈내에서 농경과 관련된 머들과 경작돌담도 확인됐다. 농경 방식은 선흘곶자왈과 거의 같으나 산전의 면적과 규모가 작아 농경보다는 목축에 비중을 뒀던 것으로 조사됐다. 청수곶자왈 내 음용수 유적은 농경과 목축 그리고 숯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병풍석은 청수곶자왈에서의 안전한 방목을 기원하기 위한 주민들의 민속신앙유적이다.
이들 역사문화유적이 자리한 지점은 모두 그곳에 걸맞은 지명이 있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각 유적마다 스토리텔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곶자왈의 보존과 활용에 있어 중요한 문화자원 중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