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9. 세화곶자왈

사진은 세화곶자왈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가두리 돌담 양식인 '어음'으로, 옛 주민들은 곶자왈에 우마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가 저녁이 되면 각자의 어음에 가둬놓고 마을로 내려왔다. 특별취재팀

죽은 물 나온다는 의미의 '주구물곶' 온천 개발로 훼손
주로 방목지로 활용 가두리 돌담 '어음' 일부 남아있어
땔감해다 쌀 등 먹을거리로 교환…농사·사냥도 이뤄져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의 옛 이름은 '고논곶마을'이다. '가느다란 곶자왈'을 뜻하는 '고논곶'에서 가늘다는 뜻의 한자어 '세(細)'와 곶과 음이 비슷한 꽃의 한자어인 '화(花)'자를 차용해 세화가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랑쉬오름에서부터 해안가까지 가늘고 길게 이어진 곶자왈의 특성이 현재까지도 마을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고논곶'으로 불리기 훨씬 이전에는 '주구물곶'으로 불렸다. 물이 끓어 죽은 물이 나온다는 '주구물곶'은 훗날 온천 개발로 이어져 곶자왈 곳곳에 아물지 않는 생채기를 남겼다. 

△땔감 마차 한 대 해야 쌀 두말

제주4·3 이전부터 세화곶자왈은 마을 사람들의 우·마 방목지 역할 했다.

세화곶자왈에서는 다른 곶자왈에서 볼 수 없는 고유의 가두리 돌담 유적인 '어음'이 숲 곳곳에 조성돼 있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당시에는 곶자왈에 우마를 자유롭게 풀어놓았다가 저녁이 되면 각자의 어음에 가둬놓고 마을로 내려왔다.

세화곶자왈 가장자리의 자투리땅에서는 농사도 이뤄졌다.

밭벼, 메밀, 콩 등을 재배했으며, 으름덩굴의  꿩과 노루를 잡는 올무를 '으름'을 채집하기도 했다. 또 곶자왈에 꿩코와 노루덫을 놓고 사냥을 나서기도 했다. 먹을 게 귀했던 예전에는 주민들의 배를 채워주는 요긴한 식량으로 쓰였다. 곶자왈에 서식하던 나무들은 땔감으로 활용됐다.

김병희 세화리 노인회장(81)은 "어렸을 때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어른들은 길이 있는 곳까지 마차를 끌고 가서 세워놓은 뒤 곶자왈에 들어가 땔감을 만들었다. 며칠씩 땔감을 만들어 마차 하나를 채우면 세화오일장이나 해안 마을로 가서 쌀 등 먹을거리로 바꿔왔다"며 "마차 한 대 분량이 고작 쌀 두 말이었다. 힘이 부쳐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땔감 하러 숲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생활이 각박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현재 세화곶자왈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1994년 세화곶자왈이 세화·송당 온천지구로 고시되면서 평탄화 작업 등 대규모 개발이 진행됐지만 2001년 공사가 중단된 이후 결국 사업 자체가 백지화되면서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다.

또 일부 지역은 밭으로 개간되거나 주민들의 주거공간으로 개발되면서 현재는 드문드문 보이는 숲만이 곶자왈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10호 정도 마을 이뤄

다랑쉬오름 남서쪽으로 뻗어있는 세화곶자왈 일부 지역에는 현재까지 돌담유적인 '어음' 일부가 남아있다.

곶자왈의 돌들을 홑담으로 쌓아 올린 형태로 높이는 약 80㎝로 측정됐다.

현장 답사에 동행한 김병희 노인회장에 따르면 예전에는 성인 남성의 가슴 높이까지 어음을 쌓아 올렸지만 세월이 지나 허물어지면서 높이가 낮아졌다.

우마를 가둬놓기 위한 석축시설인 만큼 다른 곶자왈에서 확인했던 경계형 돌담이나 잣성과는 달리 원형으로 쌓여 있다. 현재 어음 내부는 밭으로 개간되거나, 아예 이용되지 않으면서 잡풀과 나무들이 우거져있다.

이외에도 제주4·3 이전까지 곶자왈 안에 10호 정도가 집을 짓고 살았던 '월랑마을'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대나무 서식지도 확인됐다.

김병희 노인회장은 "제주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곶자왈로 몸을 숨기자 관에서 불을 질러 나무들이 모두 타 죽었다"며 "이후 다시 방목을 했을 때는 숲이 우거지지 않아 높은 데만 올라가면 우마와 어음의 위치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 권 정치부·고경호 경제부 기자 / 자문=강창화 제주고고학연구소장

세화곶자왈 내 경작지로 현재까지 농사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 1992년 11월에 발견된 다랑쉬굴 내 희생자들의 유해들. <제민일보 4·3 취재반>

오름 내 다랑쉬마을 4·3때 폐촌
1992년 동굴서 시신 11구 발견

비자림과 용눈이오름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표고 382m의 다랑쉬오름은 제주4·3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다랑쉬'라는 이름은 마을의 북사면을 차지하고 앉아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오름의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일부 주민들이 오름안에 '다랑쉬마을'을 이뤘다. 당시 마을은 10여호·40여명 규모로, 주민들은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 농사와 함께 우마를 키우며 삶을 유지했다.

그러나 다랑쉬마을 역시 지난 1948년 11월 소개령에 의해 폐촌되는 등 제주4·3의 광풍을 비껴가지 못하면서 현재는 '잃어버린 마을'임을 확인해주는 표석만이 남아있다.

특히 지난 1992년 4월 잃어버린 마을 표석에서 동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다랑쉬굴'에서 마을 주민들로 확인된 11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당시 시신 중에는 어린이와 여성 등이 포함돼 있었으며, 그들이 사용했던 솥과 항아리, 사발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등 제주4·3의 참담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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