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살아 숨쉬는 곶자왈] 10 교래곶자왈

숯가마·숯막·움막·창고·화장실 등 생활유적 다양
고망물·거멀죽은산전·고영뒤 등 고유 지명도 다수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옛 이름은 '닥리을'이다. 중산간지역에 위치한 산간마을이었던 만큼 닥리을 주민들에게 교래곶자왈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경제활동의 터전이었다. 고망물, 거멀죽은산전, 고영뒤, 눕서리, 베롱쟁이술 등 교래곶자왈 내 옛 지명들과 생활유적들은 당시 주민들이 척박한 곶자왈 땅에서 목축과 농경 생활을 활발하게 영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적극적 이용 방증

교래곶자왈 내 자연휴양림 탐방로 주변에는 농업활동과 관련된 산전을 비롯해 숯 생산을 위한 1회용 흙숯가마와 돌숯가마, 숯막(움막터), 보관용 간이창고 시설, 대형 움막터, 화장실 등 다양한 생활유적들이 남아 있다.

산전은 약 1650~2310㎡ 규모로 확인되며, 낮게는 1~2단, 높게는 4~5단 정도의 경계용 밭담과 곳곳에 산재한 60~100㎝ 높이의 머들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40년대 중반까지 주로 보리, 조, 피, 산뒤(밭벼) 등을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탐방로를 따라 300m 정도 들어가다 보면 산전터 주변에 숯을 제조하는 기간 일시적으로 추위를 피하거나 식사, 휴식을 취하던 숯막을 발견할 수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크고 1.4m높이의 겹담으로 축조돼 있으며, 내부 가운데에는 조리용 또는 보온용 용도의 화덕이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이 움막터와 3m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원형으로 돌을 2~3단 높이로 쌓아올려 축조한 화장실과 수확한 작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해 두거나 숯가마에서 제조한 숯을 임시로 보관해두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담구조의 간이창고가 확인됐다.

이를 통해 특정지구에서 장기간 혹은 주기적으로 경제활동에 종사했던 주민들이 많았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숯을 제조하기 위한 가족단위의 집단이 오랜 기간 머물 목적으로 견고하게 축조한 방형 모양의 대형 움막터도 비교적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 움막터 내부에는 큰 고목 4그루가 자라고 있을 정도로 넓어 성인 7~8명이 머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탐방로 입구에서 1㎞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조선시대 말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돌숯가마 1기도 자리하고 있다. 100년 정도 된 이 돌숯가마는 백탄을 굽는데 활용됐으며, 현재 전면부(아궁이쪽)와 양 측면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반면 후면부(배연구)는 허물어져 보호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외에도 땅을 파서 돌담을 쌓아 만든 수혈식 1회용 흙숯가마도 발견되는 등 여러 생활유적들은 교래 마을주민들이 이곳 곶자왈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척박한 땅 화전으로 일궈

마을과 인접해 주민들의 왕래가 잦았던 교래곶자왈은 다른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곶자왈 이용사' 대부분이 함축돼 있다.

제주4·3 이전까지 마을 주민들은 교래곶자왈에서 장작을 패거나 숯을 구웠다. 성인 세 품 정도의 장작을 등에 지고 봉개 및 조천 등 이웃마을로 내려가면 겨우 좁쌀 두 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숯을 구워 가면 좁쌀 한 말 정도를 얻을 수 있었으며, 양봉꾼들은 곶자왈에서 채집한 꿀을 가져가 1통 당 20원을 받고 팔았다고 전해진다.

방목도 활발했다. 일수장(대천이오름)·이수장(민오름)·삼수장(꾀꼬리오름)에 비교적 높은 잣담을 지어 소나 말을 키웠으며, 진드기를 없애기 위해 정기적으로 숲에 불을 놓기도 했다.

돌이 많고 척박한 곶자왈의 지질적 특성에도 불구, 주민들은 돌을 거둬낸 뒤 화전을 일궜다.

곶자왈 내 나무와 풀을 배어내 불을 놓았던 땅에다 조, 피, 감자, 팥, 콩 등 밭농사를 지었으며, 당시 일부 주민들은 곶자왈 내 산전터인 '베롱쟁이술'에 초가집을 짓고 거주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꿩코와 올가미로 꿩과 노루를 사냥해 식량으로 사용하거나 주변 마을장에서 물물교환을 하기도 했다.

마을 주민 고성규씨(85·교래리)는 "제주4·3 전까지 100여호의 가구가 거멀죽은산전과 웅퉁산전, 고망물산전에서 농사짓고 살았다"며 "해안가에도 농사지을 땅이 있었지만 비료가 없을 때여서 잘 안됐다. 당시 어른들은 곶자왈에서 땅을 개간해 농사짓는 것을 선호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 권 정치부·고경호 경제부 기자 / 자문=정광중 제주대학교 부총장

"풍요로운 삶 위한 주민 노력의 흔적"

[전문가 기고] 정광중 제주대 부총장

교래곶자왈은 선흘곶자왈과 함께 제주도 동부 중산간 지역의 대표적인 곶자왈로 인식되고 있다.

최대 폭이 2㎞가 넘는 용암 숲을 이루면서 상록수림과 낙엽수림이 혼재된 식생적 특성을 보이고 있으며, 교래곶자왈의 내부에서도 지질적 혹은 지형적 특징에 따라 다양하고 희귀한 식물들이 곳곳에 터 잡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에는 어김없이 교래마을 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곶자왈의 일각을 장식하는 숯가마 터, 숯막 겸 움막, 산전과 머들 등을 들 수 있다.

교래곶자왈의 범위가 아주 넓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한 번에 모든 자원을 조사할 수는 없지만 현재 자연휴양림과 생태학습장(에코랜드 동쪽지구)의 내부를 살펴보면 비교적 평탄지에는 산전의 흔적인 머들과 경계용 돌담이 남아 있다.

또 그 주변에는 숯가마 터와 숯막 겸 움막으로 사용했던 돌담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교래곶자왈 자체가 마을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산나물과 땔감을 확보하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특히 자연휴양림 탐방로에서는 좌우측으로 산전이 조성돼 있고, 산전 안에는 머들과 함께 시기를 달리하는 숯막 겸 움막, 수확물을 임시로 보관하는 간이 창고, 화장실, 1회용 숯가마, 돌숯가마 등이 좁은 공간에 배치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주로 1960년 이전에 숯을 굽거나 조, 피, 산듸 등을 재배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일구려 노력했던 교래마을 주민들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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