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30년 동안 대장장이 일을 해왔다는 부부를 만나기 위해 제주시 오라1동 허름한 작업장을 찾은 날도 김태보씨(59)는 손에 커다란 망치를 들고 있었다. 보일러공들이 쓴다는 무딘 못을 머릿돌 위에 놓고 쩌렁쩌렁 망치로 두들기는 김씨. 취재하러 왔다는 말도 못들은 모양이다. “(신문대금)수금하러 왔소?”

 서둘러야 할 물량이 있는지 김씨 부부는 싸늘한 겨울공기도 잊은 듯 바지런히 두 손을 움직였다. 올 봄 밭농사를 기다리고 있는 골갱이와 무디어진 칼들을 봄이 오기 전에 ‘밸려야(재생시켜야)’하기 때문이다.

#화덕에 내던져진 날품팔이 고아 부부
 화덕 속 불심을 잡느라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얇은 셔츠의 김씨와 맞은 편 두꺼운 옷을 동동 여민 채 무딘 골갱이 날을 그라인드에 갈고 있는 아내 박유례씨(59)의 모습은 마치 여름과 겨울을 오가고 있는 듯 했다.

 동갑내기 부부는 그러나 걸음도 떼기 전부터 쓰라린 계절을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자란 혹독한 고아의 계절을 지낸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차라리 전생의 업이 쌓인 운명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부평초처럼 살던 여자가 한림읍에서 남의 집에서 날품팔이하던 남자를 만난 것이다.

 부부는 날품팔이하던 젊은 날의 회한을 화덕에 태워보리라 마음먹었드란다. 부부는 그들보다 더 나이세월 먹은 머릿돌을 수소문해 구하고 서둘러 도시로 나왔다.

 오지랍이 넓어 경영을 도맡았던 아내는 이내 거친 도마 위에 올려졌다. 대장간에 여자가 있는 것을 안 남자들은 “천한 바닥에 여자까지 설친다”며 눈을 흘겼다.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가도 돈 없다 우습게 보기가 일수인데다 사채를 끌어쓴 돈의 이자 갚기가 빠듯했다.

 “이게 여자가 헐 것가. 농사도 거름주고 김매고 허주만 이건 여자가 헐 일이 아니주게. 코로 돌가루 들어가고 눈에 쇳가루 들어가도 돈 못 받는 날이 많았주”.

#장롱 대신 쇳덩이를 짊어지고 수십리
 양철 슬레이트를 구멍난 아이의 무릎 기우 듯 덧대어 만든 창고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안에 들어가 보니 대강 붙여 만든 벽 틈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철물점 간판도 이렇다할 사무실 가판대도 없는 그야말로 고철 창고다.

 “언제 나가라고 할 지 모르는 놈(남)의 땅에 괜히 곤(고운) 집 지을 필요 없주” 아내 박씨의 야박스러운 말투. 그러나 십여년 쇳덩이를 끌고 이사만 다녀온 이들은 정말 번듯한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처음 서문다리 부근 땅을 빌어 들어선 자그만 민속대장간은 얼마 못 가 옛 먹돌새기 석공장으로 리어카 행을 해야 했다. 장롱은 문제가 아니었다. 수십 킬로그램 이상된 머릿돌과 골갱이며 깔쿠리(물질할 때 쓰는 도구) 등 쇳덩이를 리어카에 싣고, 부리는 사람 없이 수십리를 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먹돌새기 석공장도 얼마가지 못했다. “쇳가루 날린다”며 다시 ‘축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임신한 아내는 이번에는 제발 사람 좀 부리자고 졸랐다. 사람을 쓰면 배부른 아내는 리어카에 앉고 갈 수 있겠거니 하고 웃돈을 얹어줬다. 그러나 기대는 고사하고 돈은 돈대로 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옛 동광양 물통에서 또 다시 추방돼 온 곳이 바로 이곳 오라동 고철 창고다. 그러나 부부는 10여 년의 쇳덩이 이사행렬이 잠시 멈춘 것 뿐이라 한다.

#쌀 반되 인생과 바꾼 외길 인생
 “무슨 30년이야. 10년은 쇳덩이 옮기느라 세월 다 갔지. 돈은 못 벌고 고생은 드러 허고(많이 하고)”

 쇳덩이를 때려야할 시간에 이사만 다녔으니 당연히 수입도 없었다. 쌀 반되씩 사먹는 날이 이어졌다. 아내는 큰딸 혜영이의 고사리 손에 2000∼3000원을 쥐어주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가서 쌀 반되만 사와라”.

 ‘쌀 반되’까지 오면 인생이 비참해진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식들이 있었다. 고아로 자란 부부가 유일하게 욕심을 낸 5명의 자식은 결코 주리지 않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쌀 한되 나날이 계속될 때는 없는 집 아이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을까, 집을 나가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사를 온 첫날이면 아내는 먼저 근처 슈퍼를 들렀다. “혹시 우리 아이가 과자나 훔치면 나에게 조용히 말해달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냐’는 주인의 눈을 받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가방을 매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이 마당에 나와 무식한 식칼에 자루를 꽂고 댕기를 달아주며 일손을 도왔다. 쇳가루가 날리는 마당에서 부부의 일을 학습견학이라도 하듯 재미있어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고마울 뿐이었다.

 남들은 제주 땅이 척박해 ‘뭘 해도 못 해 먹는다’하지만, 부부는 척박한 제주 땅 때문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육지는 땅이 유들유들해 길다란 외제호미를 써도 되주만 제주는 골갱이로 밭을 갈아야 해. 돌멩이도 많고 땅도 험해 좁은 호미가 더 쓸모 있기 때문이주”

 환갑을 눈앞에 둔 부부는 이제 ‘쌀 한되 인생’이 두렵지 않다. 찌든 가난은 이미 쇠를 달군 숯의 재와 함께 날아갔고, 시련은 골갱이 날처럼 날카로운 이들 의지 앞에 무디어졌다.

 35년 간 대장간 화덕이 불씨를 놓지 않고 피워 올린 것은 단순한 재가 아니었다. 외길 인생의 옹골찬 부부의 생명이었다.<글=김미형·사진=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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