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성장을 위한 독서 산책 37. 동물과의 교감을 그린 그림책

동물과 인간의 아름다운 소통 담은 걸작
약자 짓밟는 현실 풍자… 시민의식 강조

어린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다. 태어난 지 50일쯤 되던 무렵 새 주인을 만난 강아지 두 마리는 새롬이와 희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갑자기 스타가 된 듯, 텔레비전에도 나왔다. 올림픽 마스코트로 삼겠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바쁜 주인의 지극한 사랑을 받진 못했지만 세상의 관심 속에 새끼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집을 옮기게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9마리로 늘어난 새롬이, 희망이 가족은 자신들이 어찌될까, 걱정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들을 유기견이라 부르는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강아지들의 거처를 놓고 세상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새끼들과 헤어져 살게 된 새롬이와 희망이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들도 그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개들 중 한 마리일 뿐이란 것을.  

마하트마 간디는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의 원수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반려견을 버리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몸을 한 바퀴 돌리지도 못할 만큼 작은 케이지에서 동물을 사육하고, 병에 걸리면 산 채로 매장시켜 죽여 버리는 사회. 동물의 복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심각한 오지랖으로 치부해버리는 이 사회는 대통령이 탄핵된 마당에 그깟 개 몇 마리 집을 잃은 것이 뭐그리 대수냐고 반문한다. 

그것은 지나친 자기애에서 시작된 사고의 결과다. 인간 이외의 생명은 하등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인간이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이 동물을 인간의 아래 영역에 두게 했다. 그 생각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넘어서 인간사회에도 적용돼 나보다 못한 인간은 내 아래에 두고 지배해도 된다는 생각을 낳게 한다. "국민은 개, 돼지다"라는 말 속에는 국민을 폄하하는 뜻과 함께 개, 돼지가 인간보다 형편없다는 뜻도 함께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서열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 높고 낮음 없다

한스 트락슬러가 그린 「에밀, 집에 가자!」는 돼지를 키우는 가난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다. 부엌은 텅 비었고 끼니를 굶는 때가 많은 할머니는 낡은 요리책을 읽으며 주린 배를 달래곤 한다. 그래도 가끔 먹을 것이 생기면 할머니는 돼지 에밀과 꼭 나눠먹는다. 에밀을 언젠가는 잡아먹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에밀은 쑥쑥 커갔고, 할머니는 어느 날 결심을 굳혀 에밀을 데리고 도살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돼지들이 잔인하게 죽어가는 광경을 본 할머니는 차마 에밀을 그 속에 밀어넣지 못한다. 에밀을 다시 데리고 돌아온 할머니는 할머니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오해를 하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갖가지 먹을거리를 얻게 된다. 추운 겨울 가득 쌓인 눈 속에서, 그래도 할머니는 에밀과 따뜻한 겨울을 맞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물을 우리의 친구라고 강요할 순 없다. 어떻게 친구를 잡아먹을 수 있냐고 분노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자연의 세계에서 잡아먹고 먹히는 것은 당연한 순리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내는 과잉에 있다. 매장에는 수요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고기들이 정육코너에 가득 쌓여있다. 잘 팔릴 예쁜 강아지를 생산하기 위해 종자견들은 철창에 갇혀 쉼 없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한다. 팔리지 않은 강아지들이 어떤 생을 살아갈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중 몇 마리라도 돈으로 바뀌어 내 손에 쥐어지면 그만이다. 생명에 경중이 있다고 여기는 인간은 인간 이외의 생명체에 형편없이 낮은 가치를 매긴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소리 높일 줄 모르는 동물 따위는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 말로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생각하는 힘이 없는 게 아니다. "어서 먹어. 네가 쑥쑥 자라서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너를 잡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할머니를 보며 에밀은 생각한다. '할머니가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는구나' 에밀은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진심을. 어쩌면 동물은 인간보다 한 차원 높은 소통의 능력을 가지도 있는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전해지는 손길만으로도 동물들은 상대의 감정을 읽고 느낀다. 언어가 없는 대신 뛰어난 감각의 힘을 가졌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높은 지능을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 정도다. 인간보다 냄새를 잘 맡는다든가, 뛰어난 시력을 가졌다든가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엔 부족한 능력인 이유로 동물은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동물이 가진 각각의 능력이 우열을 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단지 생명 보존에 있어서 인간의 능력이 좀 더 좋은 조건에 있는 것이다. 그 하나의 차이로 여타의 동물들은 인간보다 낮은 가치에 놓이게 됐다. 인간에 의해서….

동물과의 공존, 인간의 위대함

윌리엄 그릴이 그린 「커럼포의 왕 로보」에 나오는 늑대 로보 역시 북아메리카를 점령하고자하는 유럽인들의 탐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목축업을 위해 늑대들을 사냥하던 1800년대 후반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리한 늑대들은 인간의 공격에 대응해 자신들의 왕 로보의 지도 아래 소 떼를 습격하며 인간과 전쟁을 벌여나갔다. 쉬이 잡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농락하던 로보에게 급기야 1000달러의 현상금이 붙었고, 각지에서 로보를 잡기 위해 늑대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그 중에는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도 있었다. 그는 뛰어난 늑대 사냥꾼으로 로보를 잡기 위해선 여타의 미끼나 덫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로보의 짝으로 블랑카라는 늑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블랑카 사냥에 나섰다. 블랑카를 잃은 로보는 덫에 걸리고 말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로보는 물과 음식을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로보의 죽음은 도리어 시턴으로 하여금 늑대 보호 운동을 펼치게 만들었다. 늑대 사냥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임을 깨달은 시턴은 로보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 소설을 쓰고 남은 인생을 야생 동물을 보호하는데 바쳤다. 그의 발걸음은 환경보호운동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었고 1973년 멸종위기종보호법이 회색늑대를 보호 대상으로 지정하는데 힘을 실어줬다.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밖에 할 수 없는 일임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끊임없이 동물을 학대하고 비윤리적인 살육을 일삼는다. 그러나 한편에선 그것의 부당함을 일깨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동물의 복지를 논하기엔 부족한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턴과 같은, 약자를 향한 구원의 손길을 뻗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정치·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보내는 동물 구호의 메시지가 이어진다면 우리나라에도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를 쟁취해내는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믿는다. 그 때는 우리도, 갈 곳을 잃은 동물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롬아, 희망아,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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