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7. 자주·평등·개혁 실현한 동학농민혁명

조선시대 세도정치·탐관오리 득세에 농민봉기 '혁명'
진압군·개인 등 다양한 관점 기록물 남아 있어 '희귀'
세계기록유산 세번째 추진…등재 계획 등 논의 중요

동학농민혁명은 최근까지 우리나라 곳곳을 밝혔던 촛불과 오버랩(Overlap)된다.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인간존중과 자주, 직접민주주의, 평등, 민주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이 담긴 기록물이 3번째 도전에 나선다. '세계인의 기록'에 도전하는 동학농민혁명을 되짚어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모색하고 있는 4·3의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동학농민혁명 발생 배경

19세기 조선은 순조와 헌종, 철종 등 3대에 걸쳐 나이어린 왕들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로 이어지는 세도정치가 이뤄진다. 이로 인해 중앙정치 기강 문란은 극에 달하고 탐관오리의 득세를 가져온다.

이 때문에 사회는 동요하고 봉건적 수취체제의 기본이 되는 전정(토지세)과 군정(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내는 세금), 환곡(관곡을 빌려주고 갚도록한 제도) 등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지방관들의 농간으로 삼정은 수탈의 수단으로 변해 농촌사회 파탄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지주제의 확대 발전과 농법(이앙법)의 발달은 농촌사회의 계층을 급속히 변화시켰다. 또 세금 총액제로 빠져버린 지방양반 토호들의 세금까지 농민들이 부담한다.

때문에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산 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민이 돼 굶어 죽는 자가 속출했고 이로 인한 민중의 불만이 더욱 커지면서 봉건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주민의식이 싹트게 된다.

아울러 조선에서의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일본이 경제적 침략에 주력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로 전락한다. 일본이 값싼 생필품을 미끼로 쌀을 수입하자 국내 쌀값은 폭등하게 돼 조선 민중은 고물가와 식량부족에 허덕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관리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둬 민중을 수탈했으며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성행했다. 돈으로 벼슬을 산 관리들은 그동안 들인 비용을 충당하고 축재를 위해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름으로써 민중의 삶은 고통이 가중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경제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 계급의 무자비한 착취와 외세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의식으로 발전돼 갔다.

봉건체제의 모순이 깊어지면서 1862년 이래 삼남의 70여고을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농민봉기는 1892년께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 출신의 몰락양반 최제우가 자본주의 열강이 점차 침략의 야욕을 뻗쳐오던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항해 창시한 민족종교였다. 동학사상의 핵심내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봉건 지배계층은 백성을 오로지 수탈의 대상으로만 보았으나 동학은 평등사상을 제시했다. 이는 봉건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볼 때 유교적 기존질서를 뒤흔드는 불온사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됐지만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이념이었기에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진다.

△기록물의 가치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1894년과 1985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종합적 기록이다.

이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임명장, 회고록 등 관련 기록,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담한 관료 및 진압군의 공문서와 보고서 등 조선정부 기록, 민간인의 문집 및 일기 등 민간 진압 기록, 개인들이 동학농민혁명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한 개인 견문기록, 일본 측 관련 기록물 등을 말한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세계 유일의 기록으로 가치를 지닌다. 세계 여러 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지만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세계사적인 가치가 있다. 또 동학농민군, 정부, 관료, 진압군, 민간지식인 등 여러 주체가 각각의 관점에서 인식한 기록으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완전성과 희귀성이 있다.  

△동학이 제주4·3에 주는 교훈

문화재청은 201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기록물 선정을 위해 지난 2015년 7월20일부터 8월31일까지 대국민 공모를 실시한다. 공모 결과 4·19혁명기록물과 국채보상운동기록물 등 모두 13건이 접수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경상북도도 동학기록물로 각각 대국민 공모에 응모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군 임명장, 회고록 등 동학농민군 기록(27건), 동학농민군 진압에 가담한 관료 및 진압군 공문서와 보고서 등 조선 정부 기록(115건) 등 모두 171건을, 경북도는 상주 동학교당 기록물 1425점을 제출한다.

하지만 동학이란 한 분야에 대해 각각 신청서가 접수되는 바람에 두 기관 모두 탈락한다. 앞서 지난 2013년에 이어 두 번째 쓴 잔을 마신 것이다.

실제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위원회는 상주동학교당기록물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 교당의 유사한 기록물까지 포함하고 동학혁명기록물을 아우를 필요가 있다'고, 동학농민혁명기록물에 대해서는 '동학혁명 및 동학교당기록물로 통합해 상주동학교당 이외 다른 지역 교당 규사기록물까지 포함해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검토의견을 달았다.

특히 '관련 지자체 및 단체간 상호 협력해 공동으로 추진하는게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이는 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걸음마도 떼지 못한 제주4·3에 시사점이 크다. '제주4·3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라는 목표만 정해졌을 뿐 구체적인 등재 대상이나 계획, 방법 등의 제시는 부족한 상태다.

더구나 추진 주체는 물론 기록물의 범위도 명확하지 않다. 때문에 4·3의 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추진 주체를 설정하고 자료 수집 등을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둠의 역사로 묻혀있던 4·3이 빛을 보는데도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세상과 마주한 4·3의 기록물이 기록유산 등재로 한 단계 도약할 때 제주가 진정한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인터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
"지자체 의지 가장 중요" 강조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제주4·3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추진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추진주체가 구성되면 이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히 협의해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방자치단체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장은 "동학농민혁명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기록물이 전국적으로 여러 기관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어 이를 목록화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추진주체와 지자체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부장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1894년부터 2년간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종합적 기록"이라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세계 유일의 기록으로 일정한 장소와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가치가 있고 하나의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완전성과 희귀성을 갖는다"고 평가했다.

이어 "지난 2015년 6월 동학농민혁명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추진위원회를 꾸려 4차례에 걸쳐 학술연구분과위원회를 개최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대상과 범위 등을 정하고 등재 신청 기록물 목록을 확정했다"며 "하지만 같은 해 문화재청에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선정되지 못해 올해 다시 등재를 추진중"이라고 설명했다.

또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인간존중, 자주, 직접민주주의, 평등, 민주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이 표현된 것으로 인류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기록유산"이라며 "등재가 확정되면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들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해 기록물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가치를 널리 알려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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