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 연재를 시작하며

모든 존재 존귀함 되새기는 기회, 현미경 역할
영화읽기 통한 심리적 치유와 성장 경험 연재

바야흐로 다매체 시대, 읽을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그 중에 영화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종이책을 넘어서고 있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해 '보여주는 이야기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폭력'을 내장한 할리우드 영화가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는 즈음, 대중의 비판적 의식의 고취와 시대에 대한 올바른 사유를 공유하기 위해 본고는 영화에 대한 새로우면서도 비판적인 독법을 시도한다. 
영화는 단순히 '보기'가 아닌 '읽기'의 텍스트다. 영화 읽기를 통해 시대와 역사, 인간 삶의 생생한 국면을 읽어내야 한다. 영화 읽기는 궁극적으로 존재와 역사,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영화 읽기에 있어 여성주의적 시각은 이 시대의 가부장적 폭력성을 비판하고 상처받은 영혼을 쓰다듬으며 소외된 생명들을 존귀하게 살려내는 의미 있는 현미경이 될 것이다. 

'예술'로서의 영화

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제작된 짧은 영화, '열차의 도착' 시사회를 기점으로 영화는 돈 주고 보는 예술매체가 됐다. 처음부터 영화가 예술로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과 음악, 회화, 조형, 기술의 접점을 기묘하게 결합, 거듭 진화·발전하면서 '제7의 예술'로 당당한 자리를 차지했다. 당당한 자리매김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과 문화를 선도하는 제왕의 자리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무비' '시네마' '필름' '활동사진' 등의 용어로 지칭되는데, 그 어원을 살펴보면 모두 스틸사진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즉 카메라와 마이크로폰이 창출하는 현실의 신비와 영상 및 음성의 몽타주에 의해 창작되는 독자적인 예술이라는 뜻이다. 

현대에 와서 영화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유력한 수단인 동시에 가장 대중적인 오락의 주체가 됐다. 하지만 막대한 제작비와 흥행 상의 요청으로 산업화되면서 영화는 이중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하나는 흥행 담보를 위해 지나치게 오락성을 추구하게 되면서 속도와 시각적 쾌락에 집중하면서 사유의 마비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승·패 혹은 선·악의 뚜렷한 결말로 몰아가는 이분법적 서사구조의 관행이 유연한 사고의 방해와 더불어 특정 이데올로기를 학습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예술의 본래적 의미인 '세계에 대한 총체적 반영'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세계 내 존재들에 대한 존엄성을 훼손할 여지를 갖고 있다. 따라서 1911년 이탈리아의 평론가 리치도 까뉴도가 선언한 '제7예술'로서의 영화, 예술로서의 본래적 의미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영화 소비자인 관람자 또는 독자들은 영화를 하나의 세계 텍스트로서 능동적 독해가 불가피하다.  

사유도구로서의 영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영화에 대해 "정치학, 미학이 다툼을 벌이는 투기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미국)이래 영화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실어나르는 '움직이는 기계'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미적 특질들을 충분히 실험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제 위치를 분명히 하려는 시도 또한 지속되고 있다. 

어쨌든 영화는 세계, 인간, 힘의 관계, 미의 가치 등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힘의 역학관계를 내면화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즉, 소비자의 삶 속으로 교묘하게 파고드는 영화장치의 서사구조는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어떤 게 좋은 영화이며 어떤 게 나쁜 영화인지 판별을 불가능하게 한다. 현란한 이미지의 자극, 달콤한 로맨스적 서사, 현실성 없는 이상적 캐릭터, 승·패가 분명한 서사구조의 영화는 그야말로 나르시즘적 쾌락에 빠지게 한다. 

영화가 정치적 도구인지 아니면 미학적 도구인지 이분법적 정의 내리기는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소비자인 관람자, 독자의 영화 수용에 있어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독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화 관객은 당당하게 영화주체로서 제 목소리를 다해야 한다. 나쁜 영화는 구매하지 않겠다고. 성숙한 관객은 영화를 오락의 도구로만 삼을 것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고, 세계 내 존재들에 대한 존귀함을 되새길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로 대하는 자다.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위배되는 영화에 대해서는 쓴소리와 함께 불매선언도 과감히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책을 읽듯 영화를 읽어보기

2017년 4월 현재, 극장 개봉된 영화들을 살펴보면, 테러와의 전쟁에서부터 가족 간 사랑, 운명적 사랑과 모험, 권력의 허구성 고발, 우주 생명체의 위협, 계급·인종·성차별 이데올로기와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 모두가 의미 있는 주제이며 고른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이어지고 있는 시점에 영화관객은 줄어들지 않는걸 보면 영화가 주는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영화로부터 어떤 희망,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은 영화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최근 가장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히든 피겨스'만 보더라도 스토리를 요약하면, '흑인 여성 3인조 과학자의 나사(NASA) 입성기'다. 흑인, 여성, 천재, 실화라는 키워드를 절묘하게 결합해 구축해낸 승리의 서사인 셈이다. 즉, 영화의 주인공 흑인 3인조 여성과학자는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미국이 소련에 대한 우주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현격한 공을 세웠다는 스토리다. 

'히든 피겨스'는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등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화제가 됐다고는 하나 결국, 할리우드 영화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할리우드 서사의 한계는 다름 아닌, '어떠한 어려움도 인내와 재치, 지혜로 승리할 수 있다'이다. 이것은 세계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해도 넘어서지 못하는 고통의 장벽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세상 혹은 인간 읽기의 교재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세계의 진실과 좀 더 가깝게 다가는 도구, 그것이 영화일 수 있다는 기대감, 그것 때문이다. 세계의 진실과 마주하겠다는 성실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책을 읽듯, 영화를 읽어보자. 고전독서가 어려운 것은 인내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낯선 영화들에 대해 같은 호소들이 흘러나온다.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못 보겠다고. 하지만 인내력을 가지고 자꾸 보다보면 아, 이것이구나 하는 지점이 올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의미에 느낌표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강은미

시인. '시와 영화의 상호텍스트성 연구'로 박사학위. 제주대에서 문학과 스토리텔링을 평생교육원·도서관 등에서 치유적 독서, 글쓰기를 꾸준히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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