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3. 영화가 영화에 대해 묻다

현대인에게 영화는 오락의 도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단순히 오락의 도구라 치부해버린다면  영화에 참여한 수많은 예술가들의 협업과 역량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에 동원되는 인력만 해도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카메라감독, 작곡가를 비롯 연출, 구성, 편집, 의상, 소품… 등에 필요한 인력이 엄청나다. 그렇게 많은 예술 인력들을 동원해 겨우 오락거리를 만드는 거라면 굳이 그렇게 고급 인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공장에서 찍어내듯 형식과 내용의 변주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것이 영화가 영화에 대해 도전하는 첫 번째 물음이다.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1994), '4월'(1997), '아들의 방'(2001), '나의 어머니'(2015)의 이탈리아 영화 감독 난니 모레티(Nanni Moretti 1953~)는 미국의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과 함께 연출, 시나리오, 연기를 모두 도맡는 제작방식을 취하는 대표적인 감독이다.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는 '베스파' '섬들' '의사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감독 자신의 일기에서 추출해낸 일상을 영상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이 감독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라고 보아야 하나. 딱히 그렇다고 볼 수도 없다. 감독이 주인공 역을 맡은 어떤 영화감독의 서사라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물음을 던져주는 매체

난니 모레티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는 배우이면서 감독, 실제이면서 허구, 카메라의 이동이면서 편집, 사소한 일상이면서 정치적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스치듯 보여주는 이미지 속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잔재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로마의 극장가에 걸려 있는 영화는 온통 폭력적인 것들이고, 그해 여름에는 '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 Henry: Portrait of a Serial Killer'가 평론가의 호평 속에 흥행 중이다. 폭력?오락 영화의 흥행을 지켜보는 감독은 베스파를 몰고 파졸리니가 살해당한 해변가로 향한다. 난니 모레티는 오락영화의 폭력성과 파졸리니가 고발한 폭력, 또한 그를 살해한 폭력… 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가 무엇을 말해야하는지도.

"집 구경을 무엇보다 좋아해서 이리저리 가보는데 가르바뗄라 지역이 꽤 마음에 든다. 그곳의 임대주택을 둘러본다. 그저 밖에서만 집을 구경하는데 그치지 않고 안이 어떤지 보러 들어갈 때도 있다. 벨을 울리고 집안을 좀 보자고 한다.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집주인들은 대게 무슨 영화냐고 묻는다. 대답이 옹색해진다. 트로츠키주의자인 파스타 요리사의 이야기로 50년대의 이탈리아가 무대인 뮤지컬이라고 둘러댄다. 베스파를 타고 가다가 살만한 다락방을 보려고 멈춰서기도 한다. 집주인이 팔 의사가 있건 없건 길에 서서 올려다보면서 보수할 상상을 하곤 한다." (난니 모레티 영화 '나의 즐거운 일기' 내레이션 중에서)

난니 모레티가 영화 속에서 그려내고 싶은 세계가 무엇인지를 들려주는 대사이다. 이집저집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이 지구라는 임대주택에 세 들어 살면서 옹색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는 모양새는 제각각 달라서 카메라를 내밀하게 들이대면 각각의 서사가 쏟아져 나온다. 영화감독은 그것을 영상적 언어로 주워 담아 보여주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말하지 않은 언어'를 '말하는 언어'로 재창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집주인이 팔 의사가 있건 없건 길에 서서 올려다보면서 보수할 상상'을 하듯이 말이다.

이 영화의 2편 '섬들'에서는 문명을 거부하던 순수한 철학자 친구가 텔레비전 중독증에 빠져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 3편 '의사들'에서는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던 모레티가 피부과를 찾았고, 결국은 임파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영화는 아침에 마시는 물 한잔이 치료를 위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감독의 실제이야기인지 가짜이야기인지 의심하게 하면서 영화는 끝이 나는데, 결국 '나의 즐거운 일기' 1,2,3편 모두 '산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수렴된다. 답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또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물음을 던져주는 매체이다.

로버트 알트만, 할리우드 겨냥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플레이어'(1992)는 영화가 영화에 대해 묻는 직접화법의 영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리우드 영화의 허구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플레이어'는 안젤리카 휴스턴과 존 쿠삭을 비롯해 버트 레이놀즈, 평론가 찰스 채플린, 앤디 맥도웰, 셰어, 닉 놀테, 수잔 새런, 로버트 알트만 자신을 포함해 60여명이 넘는 할리우드의 실존 인물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면서 영화가 영화를 보여주는 메타영화이다.

영화 '플레이어'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할리우드 영화사 대표 그리핀 밀은 자신에게 협박 엽서를 보내는 시나리오 작가를 어쩌다 살해하게 되었다. 경찰의 조사가 압박을 가해오는 와중에 그리핀 밀은 죽은 시나리오 작가의 애인과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결국은 위기를 모면해 영화 흥행에도 성공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스토리만 보면, 정말 할리우드 적이다. 영화는 살인을 소재로 앤딩까지 스릴러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또한 주인공의 상황, 심리 상태 암시를 포스터라는 코드를 사용한다.

영화에서 고발하고 있는 할리우드적 영화 문법은 '스릴·웃음·폭력·희망·따뜻함·나체·섹스·해피앤딩'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런 요소가 들어가 있는 영화를 관객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즉, 관객의 입맛에 맞춰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 초반에서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음, "영화는 관객이 만드는 건가요 아니면 작가가 만드는 건가요"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화에서 톰이라는 시나리오 작가가 말한, "스타도, 추격 장면도, 해피엔딩도 없으며 결백한 여인이 죽어가는" 그런 진실의 영화는 왜 없는 것인지.

영화의 마지막 씬은 코미디 그 자체이다. 영화는 살인자 그리핀이 별 탈 없이 승승장구해서 영화흥행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가 만든 영화는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여인을 남자주인공이 나타나 가볍게 구출하는 해피엔딩 영화이다. 가스실에 갇혔던 여자(줄리아 로버츠 분)가 구출하러 온 남자(브루스 윌리스 분)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라고 묻자, 남자는 "빌어먹을 길이 막혀서 말이야."라고 대답한다. 이때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고전 영화에서나 흐를 것 같은 음악이 흐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오손 웰즈, 히치콕, 베르톨루치를 잇고 넘어서면서  로버트 알트만은 할리우드를 끝까지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조롱한 것은 돈이 된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영화장사꾼들과 그를 둘러싼 영화시장이다. 아니 어쩌면 영혼이 없는 영화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없고, 허상만 있는 영화가 왜 그리 재밌기만 한 거냐고. 마치 난니 모레티가 '나의 즐거운 일기'에서 만난 친구 제라르도처럼 말이다. 순수 철학자였던 제라르도는 섬에 갇히고 마니 텔레비전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갇힌 섬은 어떤 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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