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11. 4·19혁명 기록물

1960년 3·15 부정선거 발단
이승만 독재정권 붕괴 기여
세계 최초의 학생 민주혁명
3세계 민주화 경로 모범사례
올해 기록유산 등재 재도전

아시아 민중 봉기의 시작은 1960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 국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중대한 사건은 정권에 대한 대중 참여의 새 시대를 열었다.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 사건이며 민주주의 역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4·19혁명이 미래세대와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한 두 번째 도전에 나선다.

△4·19혁명의 원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됐을 당시에는 민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실제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흘러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 이승만 정권은 1960년 민주주의를 유린한 3·15부정선거를 자행한다.

3·15부정선거 직후 마산에서 이에 항거하는 대대적 시위가 발생한다. 평화적 시위였음에도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 8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비슷한 시위가 포항, 대전, 수원, 오산,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들불처럼 번진다. 또 교수와 언론인, 변호사들은 단체를 조직해 시위 학생들 지원을 위한 공개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역사에 '피의 화요일'로 남아 있는 같은 해 4월19일 경찰은 맨몸으로 거리에 나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날 하루 서울에서 104명,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사망한다.

남녀노소를 망라한 전 국민적 저항에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어 같은 해 7월29일 총선에서 이른바 '장면 내각'으로 불리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윤보선 전 대통령이, 총리는 장면 총리가 취임하지만 1961년 5·16쿠데타로 장면 내각은 붕괴된다. 

△국민 저항 통한 민주주의 각인

4·19혁명은 민주주의역사가 일천한 사회에서도 반독재의 국민적 저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급진전시킬 수 있음을 국내·외적으로 보여줬다. 나아가 4·19혁명은 그 뒤를 이었던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의 촛불항쟁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

특히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명시된 민주주의와 통일의 기본이념으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학생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 최초의 민주혁명이라는 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4월 혁명은 3·1운동, 해방과 더불어 우리 역사의 큰 획을 긋는 대 사건으로 민주주의 역사의 찬연한 금자탑이라 할만하다.

4월 혁명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역사가 지향해야할 방향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됐고 인간의 기본권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보장됐으며, 관권과 경찰의 폐단이 감소했고, 법치주의가 상당부분 자리 잡았다.

이와 함께 4·19혁명은 당시 일본에서의 안보투쟁, 터키에서의 반메데르스 시위, 대만의 지방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남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대만 등 아시아의 다른 미동맹국들에서 진행된 정치상황에 간접적이지만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제3세계 국가들의 민주화 경로에 있어 하나의 선행적 모범을 제시해주고 있다.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한 여정

4·19혁명 기록물 등재 대상은 국가기관 생산 자료와 국회·정당 생산 자료, 신문자료, 학생·시민 생산 자료, 사상자 기록·수습활동 자료, 사진·영상 자료, 박물류, 외국 자료 등 모두 8개 주제에 1449점이다.

4·19혁명 기록물은 지난 2010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와 정근식 서울대 교수,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등 최고의 근현대사 전문가들로 구성된 10여명의 연구팀이 2년에 걸쳐 수집했다.

이어 지난 2013년 4·19혁명 유네스코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출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본격적으로 추진 중이다.

이후 2017년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상 기록물 선정을 위해 문화재청이 지난 2015년 7~8월 실시한 대국민 공모에 응모,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군영등록' 등과 함께 최종 후보 4건에 선정된다.

당시 4·19혁명 기록물은 "4·19혁명과 관련된 자료들로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긍정적 의견을 듣지만 최종 기록유산 등재 대상에서 제외되는 아픔을 겪는다.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4·19혁명 기록물은 올해 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두 번째 도전에 나선다.

4·19혁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4월27~5월12일 진행된 문화재청의 '2018년 세계기록유산 및 2017년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 등재신청 대상 기록물 공모'에 응모,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화해·상생 정신 세계인의 가치로

제주4·3은 섬의 기억을 넘어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기 위한 첫발을 힘겹게 내딛었지만 아직 과제도 산적해 있다.

제주도는 최근 행정자치부에 4·3 세계기록유산 등재 준비에 소요되는 국비 2억원을 신청했다.
하지만 정부나 NGO 등이 중심이 돼 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다른 기록물과 달리 제주4·3은 아직 구체적 추진 주체가 정해지지 않았다. 또 4·3 기록물 2만6824점이 등재 대상으로 검토되고 있을 뿐 구체적 대상도 명확하지 않다.

내년이면 제주4·3 70주년이다. 강산이 일곱 번이나 변하는 시간이다. 긴 시간 동안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제주4·3은 사람들 기억에 남는데 성공했다. 제주4·3이 올곧은 빛의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인의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이를 통해 화해와 상생의 4·3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제주가 진정한 세계인의 평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인터뷰] 김영진 4·19유네스코기록유산등재추진위 이사장

"제주4·3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를 잘 정리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김영진 4·19혁명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및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이사장은 "국가를 넘어선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 등을 유네스코 심사위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라며 이 같이 조언했다.

김 이사장은 "4·19 기록물은 55년 이상 흐른 시점에서 유네스코에서 요구하는 조건, 즉 원본과 희귀본, 유일본에 충족하는 기록물을 수집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며 "앞서 기록유산 등재된 5·18의 경우를 참고할만한데 5·18은 1995년부터 광주광역시가 자료수집에 착수하면서 오랫동안 기록물을 수집, 분류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추진위원회 적절한 구성과 관련해 "4·19와 5·18은 상임고문단과 이사진, 자문위원단, 사무국 등 비슷한 등재추진위 조직 구성을 갖추고 있다"며 "4·19추진위는 조직을 구성하면서 불교계종정, 원로목사, 전직 국회의장단, 4·19원로, 4·19단체대표 등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고, 근현대사 전문연구자로 구성했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은 "4·3 당시 그리고 이후 진상규명투쟁과정에서의 기록물의 원본을 수집하는 작업이 잘 진행돼야 한다"며 "개인이나 단체 등에서 소장하고 있는 사진이나 영상이 소중한 가치를 갖는 만큼 이를 수집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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