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기를 통한 치유의 인문학 13. 모성에 대한 두가지 시선

웃는 법 조차 잊어버린 퍽퍽한 현실 공감
모성애 강요하는 집단적 무의식은 '폭력'

요즘 여성들에게 화두가 되는 것 중 하나가 '자기 돌봄'이다. 아이를 낳고, 또 자랄 때가지 전 과정에서 엄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그렇다.

아이를 돌본다는 게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는 여성마다 다르지만 양육에서 교육, 취업준비, 결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개입하게 된다. 

개입의 의지는 주체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시선 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안전한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데서 오는 불안감 때문이다. 대기업 또는 공공기업 근로 여성인 경우는 그나마 직장 보육시설이 갖추어진 경우가 있어 취학 전까지는 의지할 데가 있어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취학 이후는 마치 전쟁을 치르듯 아이를 양육하고 돌보는 일에 매진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을 돌볼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비정규직 여성, 경제적으로 취약한 일자리를 갖고 있는 부양자를 둔 가정이야말로 이·삼중의 노동에 시달리는 현실이다. 경제적 취약, 강도 높은 노동,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녀와의 소통 부재, 왜곡된 시선 등이 여성들을 병들게 한다.

실제로 여성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받는 강도 높은 스트레스는 다양한 형태의 정신병을 양산하고 있다. 

옅은 미소에 감춰진 묘한 슬픔

영화 '파티마:엄마의 일기'(2015)는 지극한 모성애를 그린 영화이다. 국적만 다를 뿐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머니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엄마 파티마(소리아 제루알 분)는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건너와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경제적 궁핍, 익숙하지 않은 언어, 이국의 문화적 풍토 등은 파티마를 경계인으로 느끼게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파티마는 두 딸을 공부시키기 위해 가사도우미, 청소부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큰 딸 네스린(지타 앙로 분)은 엄마의 사정을 이해하기에 매사에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한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둘째 딸 소드(켄자 노아 아이쉬 분)는 사사건건 엄마와 갈등을 일으킨다. 파티마는 이런 딸이 못마땅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파티마는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감정의 파동은 가정의 파국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파티마는 도통 감정을 알아차릴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이 자주 클로즈업 된다. 오죽해야 "기쁘면 이렇게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알겠구나"라고 토로하겠는가. 파티마는 웃는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엄마다. 

70여분 내내 조용하고 진중한 울림으로 지속되던 영화의 말미에 파티마는 한 번 웃는다. 합격자 명단에서 딸의 이름을 찾아냈을 때이다. 수많은 이름들 속에서 딸의 이름을 발견하고 손으로 짚어가며 옅은 미소를 짓는 파티마의 얼굴에서 묘한 슬픔을 읽는다. 엄마는 결국, 자식이 힘이구나 싶기도 하고, 자식이 별이 되는 시간에 엄마는 누가 돌보지 싶어 씁쓸해진다.  강인한 파티마도 힘겨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정신과를 찾고 글쓰기를 통해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모성애란 과연 무엇인가

'파티마 :엄마의 일기'가 자신을 희생하면서라도 아이를 잘 키워보겠다는 확고부동한 모성을 보여준 영화라면 '내 사랑 잔'(라시트 제리케제르, 2011)은 모성애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갖게 하는 영화이다.  

영화는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한 아이를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된다. 이름은 잔이다. 아이가 없는 부부, 제말과 아이셰은 아이를 가질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다. 사실 아내 아이셰온은 아이를 입양하는 것이 탐탁치 않지만 남편 제말이 원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용한다. 남편 제말은 아이가 없다는, 그것도 자신의 신체적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아이를 입양할 준비를 다해놓고, 아이셰온 배에 인형을 집어넣고 마치 아이를 가진 것처럼 꾸민다.

잔을 입양한 후 부부 사이는 급격히 멀어진다. 사소한 갈등으로 인한 싸움이 잦아지더니 결국 제말이 집을 나가고 만다. 그때부터 아이셰온과 잔의 서먹한 동거가 시작된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걱정인 아이셰온은 식당에서 일하는 시간 동안 아이를 방치한다. 

잔은 하루 종일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놀이터에서 깔깔거리며 노는 아이들이 부럽기만 하다. 일곱 살이 되는 동안 잔이 터득한 건 특유의 생존법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의 마음에 들 수 있는 방법은 울지 않고, 보채지 않고, 엄마의 '직무유기'를 눈감아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도둑으로부터 엄마가 소중히 여기는 것(저금통)을 지키는 것으로 엄마의 사랑을 찾을 수 있었다. 

이것이 실제 이야기라면 아이셰온은 아동학대죄로 처벌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법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중첩된 고통이 있다.

사회적 양육에 대한 자각 필요

영화는 다양한 시선의 폭력 문제를 다룬다. 우선 아이 없는 가정에 대한 편견이 남편 제말의 강박증을 자극을 했다. 아이 없이 사는 부부에 대한 사회적 시선, 아이 없이도 행복해질 수 있는데도 뭔가 불행할 것 같은 연민의 시선이다.

둘째는 가족개념에 대한 편견이다. 영화에서 남편 제말이 입양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아내의 임신을 꾸민 데는 '핏줄'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부부의 성숙된 합의에 의해 잔을 받아들였다면 모자가 관계를 회복할 시간이 보다 짧아질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ㄱ 되지 않은 입양이 한 아이를 학대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셋째, 모성애가 없는 여성에 대한 혐오의 시선이다. 아이셰온은 아이를 입양하고 나서 최선을 다해 키워보려고 하지만 감정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전 과정을  몸으로 느끼는 과정이 축적된 결과가 모성애라는 것이 아닐까. 그 것은 사람에 따라, 처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남편 제말이 떠난 이유는 어쩌면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 아이셰온에 대한 혐오였을 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남편의 행적을 숨기면서 알려주지 않은 이유도 아이에 대해 사랑 없는 엄마에 대한 부정적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셰온은 외로웠다. 이해받지 못하는 슬픔을 넘어, 양육과 혐오의 시선을 감당해야하는 이중구속이 그녀를 참혹하게 했다.

하지만 영화는 핏줄을 넘어선 모성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모성애는 여성, 핏줄, 유전이라는 도식을 넘어선 인간 공통의 감정이다.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회가 여성과 모성애를 동일시 하는 시선을 가질 때 여성은 비합리적인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집단적인 무의식이 여성에게 유독 모성애를 강요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아이는 사회적 양육의 대상이라는 자각, 이것이 우리 사회가 보여줘야 할 성숙한 모성애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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